예술화의 본질
/이용욱 전주대한국어문학과교수
마크 아메리카의 하이퍼픽션 <Grammatron>은 '문학계의 하이퍼텍스트 수소폭탄'이라 표현될 정도로 큰 호응 불러일으켰으며, 1100개 이상의 텍스트, 2000개의 링크로 구성되었으며, 40분여의 OST를 포함하는 Virtual Art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자문명이 극도로 발전했을 때 글쓰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사람이 전자매체를 이용해 글을 쓰는 단계에서 나아가, 전자문명의 발전으로 전자 매체 자체가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읽어 글을 쓰게 되는 상황을 허구적으로 그려냈다. <그래마트론>이라는 제목은 Gramma(글쓰기에서 의미의 기본단위) + tron(기계) = 글쓰기를 위한 기계를 의미한다. 마크 아메리카는 이 작품을 정지된 평면적 서사물이 아니라 입체적, 역동적 내러티브 환경이라는 공간적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문학 작품의 차원을 떠나서 다양한 실험성이 문학 장르에 접목된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그 구성은 [이야기+참고자료+작가소개+작품소감](언어적텍스트) + [배경음악](청각) + [동영상+이미지](시각) 등 멀티미디어 텍스트를 포함하는 복합예술이다.
<그래마트론>의 주인공인 '나'는 글쓰기 기계이자 기계와 합쳐진 인간 즉 사이보그이다. 기계는 글을 쓰기 위한 도구이기도 하고 실제로 기계가 글 쓰는 사람의 의식이 되어 글을 쓴다. 텍스트에서 대문자로 나오는 IT는 대명사 'it'를 의미함과 동시에 'Information Technology'를 연상시킴으로써 디지털 존재와 정보, 기술문명과 인간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나타낸다. IT가 가상공간에서 하는 여행이 이 작품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하이퍼픽션은 소설을 모방했지만 소설을 창조했다.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 새로운 소설 양식이 기존의 영화·소설 등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이야기 구조가 하나의 선(線)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중의 방향을 갖는다는 것이다. 또 일방적으로 독자가 정보를 제공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텍스트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하이퍼링크(hyper link)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것으로 독자가 텍스트를 조합해 제2의 창작이 가능하도록 한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 하이퍼픽션이 CD롬 타이틀로 이미 계속 출간되고 있으며 집필을 위한 전용 소프트웨어도 시판되고 있다. 하나의 소설 속에 수십, 수백 가지의 다양한 줄거리 전개가 가능한 컴퓨터 전용 전자책이라 할 수 있으며 독자는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그리고 이야기의 고비마다 그때그때 자신의 선택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른 줄거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마트론>은 문학의 미래에 대한 거대한 은유이다. 모방을 통한 창조가 예술화의 본질이지만 기술의 발전은 이제 인간만이 예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어졌다. 충분한 데이터와 적절한 기계학습만 수반된다면 비인간행위자도 예술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롱기누스의 영민한 지적대로 예술가는 모방하려는 대상과 자신의 모방 행위 사이에서 어떤 심미적 영감을 받아야 한다. 모든 예술은 도구를 필요로 하며 예술 행위는 비인간행위자인 도구와 인간행위자인 예술가 사이의 정서적 교감이며 가치의 교환이다. 기계의 예술화 능력이 아무리 고도화된다 하더라도 비인간행위자가 비인간행위자를 사용한 행위는 결코 심미적 영감을 만들어낼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디지털시대 예술화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찰라의 심미적 영감을 창의로 수렴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야말로 예술행위자로서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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