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에 잠긴 집과 땅이 무려 6만결(結)이었다. 이미 여러 해 농사를 망치고 하늘이 큰 비를 내리니 물로 고통받는 사람을 구할 수 없어 모두 멀리 흩어졌다.…(중략)내가 아무리 궁하여도 (벽골제의)아래에 있으니 어찌 벽골제의 은택이 멀다고 하겠는가. 가재를 털고 또 관찰사와 김제군수에 아뢰어 긴 도랑 30여 리를 뚫어 물길이 흐르게 만드니 백성들이 편하게 살고 땅이 다시 비옥해 졌다.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여 이름을 송공의 물길(宋公渠 송공거)이라고 하였다.’
  김제 서예계의 거두 송재 송일중(1632년(인조 10)~1717년(숙종 43))이 사재를 털어 벽골제의 기능을 정비한 기록이 처음으로 번역돼 공개됐다.
  최근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이 펴낸 <김제 벽골제 사료집성>은 인물과 고지도, 시문 등을 선별해 게재한 벽골제에 관한 최초의 인문학적 기초 책자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사료집성은 박물관의 조사연구총서의 첫 번째 사업으로 2012년부터 조사해 온 벽골제 등 관련 사료 약 500여건을 검토, 그 중 총82건을 선별하여 고문헌 68건과 고지도 14건으로 구성 편집됐다.
  특히 신규 발굴 번역된 사료 25건은 인문지리와 인물의 일대기, 상소 및 각종 시문 등으로 시기적으론 고려 말부터 조선 중후기 자료들이다. 그간 자료 부족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던 관련 시기가 조명될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벽골제의 역사적 조명에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할 것을 보인다.
  사료집성은 총 6개의 장으로 구분된다. 6개의 장은 고지도, 역사인문지리, 수리정책, 수리제언(提言), 인물, 시문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고지도와 역사인문지리 장을 통해 지도와 지리지(地理志)가 서로 보완적으로 김제 벽골제의 역사와 인문지리적 상황을 종합할 수 있게 정리되었다.
  그리고 수리정책과 수리제언 장에서는 조선전기와 조선후기에 집중된 활발한 수리정책과 제안에 관한 논의들을 실록과 일성록 등, 관찬기록을 통해 짚어볼 수 있으며, 그 중심에 항상 ‘김제 벽골제’가 매우 중요한 수리정책의 쟁점으로 거론됨을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인물 장에서는 또 금곡(錦谷) 송내희(1791년~1867)가 지은 문량공 조간(趙簡)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는데 악룡을 물리치고 벽골제 용을 수호하여 황금 들녘의 유력가문으로 성장하는 김제 조씨 가문의 가문설화와 벽골제와의 상관성을 보여준다.
  또 한명의 호남 천재인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의 문집인 존재집(存齋集) 연보에서 위백규는 1778년에 ‘벽골제를 구경하고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벽골제 시문 장에서는 수리시설 벽골제가 펼쳐보였을 경관과 정취, 시적 정서를 볼 수 있다.
  정윤숙 학예연구사는 “사료집성은 국내외 유관기관 및 연구자 등에게 벽골제를 포함한 농업수리시설연구 자료로 활용되도록 배포될 예정이다”며 “앞으로는 김제지역 나이 드신 주민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근대 벽골제의 세대기억을 생생한 육성으로 정리하여 근대 벽골제에 대한 인문학적 구술기록자료도 집성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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