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법궁이다. 정궁이라고도 하는데 중심 궁궐이라는 말이다. 조선조에는 모두 5대 궁궐이 있었는데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과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경복궁 터가 가장 넓고 전각은 가장 장엄하다. 또 둘레만 1만여 척인데 정남향으로 안산은 남산이고 주산은 북악산이다. 내수로는 청계천, 외수로는 한강을 두었다. 그러니까 풍수지리적으로도 완벽에 가깝다.
  하지만 경복궁이 걸어온 길은 순탄치 못했다. 개국 초인 1395년에 완성된 후 화재가 자주나는 등 재난이 계속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이후 숙종이 한 때 중건을 검토했지만 여러 사정이 여의치 못해 중단했고 그 후엔 아예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경복궁에서 복구의 삽질이 시작된 것은 고종 때인 1865년이었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 체통을 살리자는 차원서 경복궁 중건에 나섰다. 재정 조달을 위해 원납전을 걷는 한편으로 전국에서 장정들을 동원해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가뜩이나 살기 힘든 시대 백성은 물론 양반들의 불만도 컸다.
  “석수장이 거동을 보라 / 망망칠 들고서 눈만 꿈벅 한다 / 경복궁 역사가 언제나 끝나 / 그리던 가속을 만나볼까”
  경복궁 공사를 위해 동원된 장정들이 부르던 노동요 ‘경복궁 타령’의 한 구절이다. 집안일은 돌보지 못하고 부역을 해야하는 괴로움이 잘 드러나 있다.
  천신만고 끝에 경복궁은 1867년 완공됐지만 이곳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는가 하면 이내 일제의 파괴 목표가 되고 말았다. 결국 많은 건물들이 헐려나가고 그 자리에는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는 비극이 벌어졌다.
  당시 공사를 주관하던 영건도감의 문서인 ‘영건일감’이 며칠 전 국역돼 나왔다고 한다. 공사 진행과정이 잘 기록돼 중요한 기록으로 꼽힌다. 특히 원납전을 내지 않은 양반들을 치죄하는 내용이 흥미를 끌었다. 모두 힘이 닿는 대로 공역을 도와야 한다며 이를 외면하는 자는 일벌백계하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또 왕실 능묘와 민간 묘소 주변 좋은 나무를 베어 도읍으로 올려보내라는 지시도 눈에 띈다.
  구한말 경복궁 공사는 무리였다. 결국 조선왕조가 망하는 데 일조를 했다는 분석이다. 민족 수난사의 비극적 상징인 경복궁은 하지만 오늘날 말쑥한 모습으로 서 있다. 1991년부터 복원공사를 진행한 덕분이다. 조선조 법궁으로서 위신이 의연하다. 대원군의 무리수가 결과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남겼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