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단상(斷想) 양규창 (시인, 전북문학관 사무국장)

무능하다 못해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자리에서 버티고 있어 본인도 국민들도 힘든 한해를 보내고 있다. 성탄절을 보내니 옛 추억이 그립다. 길거리 레코드가게 캐롤송과 함께 시작되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면 만날 사람도 기다릴 사람도 없지만 들뜬 무드에 젖어 잠을 설치던 생각이 난다. 시골교회에서 장작 난로 하나 피워놓고 추운 줄도 모르고 유리창에 말구유, 마리아, 아기예수, 동방박사 그림들을 붙여놓고 성극 연습을 했다. 성탄 전야에는 발표회가 있고 선물을 교환하고 선물을 받은 사람은 선물 속에 쓰여 있는 짓궂은 벌칙을 수행해야만 했다. 엉덩이로 이름을 쓰고, 누구와 뽀뽀하라고 하며 시골 교회는 웃음바다가 되었다. 어느 성탄절에  머리맡 문고리에 양말을 걸어 놔 봤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선물은커녕 빨래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착한 일을 안해서일까?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요즘은 세월이 변해서 그런지 거리를 다녀 봐도 케롤 송을 들을 수가 없고 문구점엘 가 봐도 카드가 없다.
핸드폰과 인테넷이 대중화되면서 각종 SNS서비스로 카드와 음악을  보낼 수 있으니
재래식 카드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문방구에 가서 서로 예쁜 카드를 사려고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디지털 세상이 돼 버린 지금이 어쩌면 쓸쓸하기도 하다. 이제는 성탄절이 우리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한다.
성탄절은 그저 좋은 날, 쉬는 날 일 뿐이다. 예전에 우리가 느낄 수 있었던 두근거림과 설레임의 크리스마스를 요즘 아이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쏟아지는 다양한 미디어, 게임의 홍수. 그 속에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 그리고 그 와중에 사라져가는 것,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할망정 점점 편의주의 화 되고 절차는 간소화되고, 그것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다종교, 다문화의 영향으로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성탄절이 새로운 문화갈등으로 등장하고 있다. 무슬림 이민자들이 많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성탄절이 자칫 종교간 갈등의 원인이 될까 몸을 사리고 있으며, 미국과 캐나다 등에서도 비기독교에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백화점과 상점들이 ‘메리 크리스마스’란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한 해안도시는 안전사고를 이유로 지역의 연례행사였던 성탄 점등식을 취소하기도 하는 등 영국 내 성탄의 의미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미국과 캐나다, 유럽의 백화점이나 유명상점들은 성탄을 맞이해 세일을 하면서도 종업원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제 성탄을 맞는 사람들의 마음과 환경은 많이 변했다.
대학가의 등록금 반값투쟁, 치솟는 청년 실업률은 젊은이들에게서 꿈을 앗아갔다.
현 정부 들어서면서 종교편향 문제가 부쩍 사회를 갈라놓고, 사회 양극화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성탄절을 맞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사랑의 나눔'이다. 여린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는 트리 위에 반짝이는 별 같은 왕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오신 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성탄절은 가족, 친구와 함께 그 기쁨을 나누는 축제의 때이면서 동시에 주위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웃을 더욱 돌아보아야 하는 절기다. 이해인 시인의<성탄 편지>를  감상해 본다.
친구여, 알고 계시지요? /사랑하는 그대에게 /제가 드릴 성탄 선물은 /오래 전부터
/가슴에 별이 되어 박힌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 안에 꽃피고 열매 맺은 /우정의 기쁨과 평화인 것을. // 슬픈 이를 위로하고 /미운 이를 용서하며 /우리 모두 누군가의 집이 되어 /등불을 밝히고 싶은 성탄절 /잊었던 이름들을 기억하고 /먼데 있는 이들을 /가까이 불러들이며 문을 엽니다 (생략)
올해는 친구들과 은사님들에게 휴대 전화 문자 메시지가 아닌 내 손으로 쓴 카드를 보내며 잠시나마 안부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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