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신기하고 진기한 것도 많다. 하기야 세상 만물이 모두 신이 만든 것이라 하니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神技)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나 사람의 것으로 신의 경지를 이룬 것들도 있다. 신기한 것과 진기한 것이 실상 크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지만 신기한 것들 중에서 정말 더욱 뛰어난 것을 진기(眞技)한 것이라 할 것이다. 오래전에 옛사람들은 그림을 평할 때 신품(神品), 묘품(妙品), 능품(能品)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런 후 진품이나 법품(法品) 등의 용어들이 사용 되었으나 이들 모두 신의 경지를 말하는 것일 텐데 우리 역사에서도 이러한 작품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특히 채용신의 그림을 신품이라 칭하는데 주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림 그리는 일이 원래 하늘로부터 타고 나야 한다고 믿었었다. 그렇지 못하면 천리행(千里行)과 만권서(萬卷書)를 해야 한다고 옛 사람들이 지적했다. 즉 천리를 여행하여 세상을 둘러보고 만권의 독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그 일이 어찌 사람의 일이라 했겠는가. 그래서 잘 그려진 그림을 신품이라 했던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림을 그리기에는 귀신을 그리는 것이 가장 쉽고, 사람을 그리는 일이 가장 어렵다했다. 당연한 것이 보이지 않은 것 보다 늘 상 보는 것은 그만큼 사람을 속이기 어렵다는 것일 터이다. 그것이 더욱 어려운 일은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있는 본 모습을 끌어내야 하는 것이니 어찌 신의 일이 아니라 할 것인가. 채용신의 인물화를 평할 때 딱 들어맞는 말이라 할 것이다.  
 

채용신은 참으로 별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림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알려진 것이 없다. 스스로 독학을 하였을 것으로 믿는 것이 맞을 듯하다. 당시에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이가 없었던 것도 그 배경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매우 이례적인 초상인물화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물론 이전에 초상인물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채용신의 경우는 이례적이고 특별한 작가라는데 주저함이 없다 할 것이다.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어떻게 하여 세상을 두루 돌다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지도 실상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인물이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빗 등을 만들어 궁궐에 납품했다고 한다. 특히 대원군이 그의 물건을 즐겨 사용하면서 친분을 갖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부친의 가업이 이와 같은 공방을 하였고 채용신은 부친을 도와 물건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나이 36에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갔다. 아마도 이 무렵까지는 부친의 일을 도우며 그의 천부적 재질을 갈고 닦는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무과에 합격한 이후 의금부도사 그리고 종3품이었던 부산진 수군첨절제사를 거쳐 칠곡군수와 종2품에 정산군수를 하는 등 긴 벼슬길을 걸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가 받은 재주는 쉬어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화업은 별도로 그의 벼슬과 함께 성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래서 1900년에는 태종 어진을 모사하는 어진청의 주관화사 즉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책임화가로 발탁이 되었고 나중에는 고종의 초상도 그렸다. 그 일이 잘 마무리되고 그 보답으로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맡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실상 조선조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1906년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56살의 나이에 벼슬길에서 내려와 마치 늙은 새가 노을을 등지고 안식을 위해 둥지로 돌아오듯 전주에 자리를 틀었다. 그가 왜 노년에 들어 전주를 택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것은 그에게 하늘이 준 천부적 재능을 꽃피워야 할 마지막 선택지로서 이미 준비된 것이었을 터이다. 운명이라 해야 마땅하다. 선친들의 본향이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전주는 그에게 마지막 안식처였지만 실상은 그에게 이 땅의 인물화를 마무리 하라는 천명을 주었다고 할 것이다.
 

채용신의 인물화는 우리 근대사의 큰 업적이고 새로운 이정표였다. 우리 역사에 인물화를 잘했던 화가가 왜 없었을까마는 채용신은 우리 인물화의 역사를 마무리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초상인물화 이후 한국 인물화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연유도 아이러니라 할 것이지만, 이전의 그림들에 비추어보아 매우 혁신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에 담겨진 특징을 설명하면서 근대적 리얼리티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들 한다. 그 예로서 입체감을 중시했던 서양화법을 잘 활용했고, 또한 당시 새롭게 들어온 서양문물이었던 사진기를 활용했다. 그리고 나아가 육리문(肉理紋)으로 불리는 채용신의 독특한 기법인 세밀한 필법은 현대미술의 극사실주의와 맥을 같이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그림을 길게 설명할 자리는 아니지만 어떻든 그는 동양화가 긴 세월을 통해 얻어내려 그렇게 노력했던 전신(傳神), 즉 대상의 본질을 과거의 수묵화법과는 다른 사실화법으로 보여주었던 인물이었다. 전신 그것은 하늘이 준 생명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니 신기가 아니고서야 어찌 다다를 수 있었겠는가. 그런 일이 어찌 평범한 사람에게 주어질까. 땅이 거들고 하늘이 화답해야 얻을 수 있는 일이니 전주가 그런 곳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는 결국 마지막 삶을 전주에서 보냈다. 전주에 내려와 주변 이곳저곳을 돌면서 여러 우국지사와 유학자들의 초상을 그리는 데 전념하였다. 그것은 커다란 역사였다. 무려 35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도록 배려한 것도 결국 하늘의 뜻이었을 터이다. 그의 중요한 작품들이 대부분 이곳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점에서 전주는 이미 준비된 땅이었다.
그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지만 특히 망국의 한을 죽음으로 달랬던 황현, 항일운동가 최익현, 김기술을 비롯하여 그 시대 대표적 학자였던 전우와 이덕응, 송병우, 기우만 등의 초상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로 엄마와 아기의 따뜻한 정을 그린 운낭자상을 비롯하여 많은 인물들을 마치 일기를 쓰듯이 그려나갔다. 그러나 천재도 하늘의 부름에는 어쩔 수 없어 1941년 91세의 나이에 정읍 칠보에서 승천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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