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개발연구소가 3일 주최한 ‘삼국통일 ‘백강전투’ 재조명을 위한 한중일 국제학술세미나’는 백강 위치에 대한 심층적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김중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장은 고대어, 역사서, 중국의 고대전쟁 기본 전략, 백제시대 지형 고증, 지역 전설 등을 근거로 백강이 금강하구 임을 주장했다.
또한 바이건싱 섬서사범대 교수는 중국 시각에서 백강 전투를 동아시아 세력의 개편이란 측면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으며 고미야 히데타카 계명대 교수는 중국 수나라-당나라와 백제-신라 관계를 균형외교 차원에서 바라보며 백강 전투의 의미를 해석했다.
이어진 종합토론에서는 이진원 군산문화원장, 곽장근 군산대 교수, 김영관 충북대학교 교수, 김은숙 한국교원대학교 교수가 참석, 주제 발표자들과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이날 주요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삼국통일 전투지 기벌포, 옥산·회현면 일대 추정

▲김중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장
삼국통일전쟁의 중요 전투 장소였던 기벌포는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의 사서에서 웅진강구, 웅진구 기벌포, 백강 혹은 백촌강으로 각기 다르게 기록되어 위치관련 논쟁이 있었다. 이는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주류성 인근에서 기벌포를 찾거나 기벌포를 정해 놓고 주류성을 찾는 방법의 한계성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주류성이 어디냐는 선입견을 버리고 기벌포에서 있었던 세 번의 전투 중 660년 당나라군이 백제를 침략할 때 첫 전투를 벌였던 기벌포 상륙전투를 중심으로 기벌포 혹은 웅진강구, 백강이 금강하구 군산 인근지역이며 그중 옥산면과 회현면 일대 임을 밝힌다.
고대 백제어에 대한 어원과 관련 충남대 도수희 교수는 백강을 금강하류로 보고 백강의 의미를 기벌포와 같은 뜻인 큰 강, 긴 강으로 해석했다.
역사서 기록에 따라서는 백제 충신 성충과 흥수가 적을 방어하기 위한 전략으로 기벌포, 백강을 거론하는데 수로를 통해 공격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모두 큰 강, 긴 강의 뜻을 내포하고 있는 금강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 간척이 진행되지 않았던 옛 군산 지형과 지질 확인, 전설 등을 종합해 볼 때 당시 군산의 서쪽 바다와 만나는 월명산 능선 일대 및 백제시대 강이 흘렀던 조촌동 매미산 줄기, 옥산면 금성산 일대가 상륙장소로 추정된다. 

 

663년 서해안 백강전투, 동아시아 세력 큰 변화

▲바이건싱 섬서사범대학교 교수
663년 8월 한반도 서해안 중부에 위치한 백강구 및 그 부근에서 당나라군과 신라군, 왜군과 백제 부흥군 네 나라가 열흘동안 전투를 벌이는 동아시아세계대전에서 나당 연합군이 승리한다, 나당연합군의 승리는 동아시아 세력의 새로운 조합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당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부강한 대륙 제국이었지만 고구려와는 요동지역을 놓고 충돌했고 고구려에 잡혀 있던 수나라의 포로 등 문제들을 놓고 모순(갈등)이 깊어 갔다. 또한 신라, 백제, 왜를 둘러싼 외교적인 갈등도 심각했다. 당시 백제는 왜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신라는 당나라 편에 섰다.
이에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백제를 멸망시키기로 결정한다. 고구려 남쪽의 백제를 멸망시켜 남북 협공의 태세를 갖추기 위함이다. 이렇게 당나라는 659년부터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적극적인 준비를 갖췄고 다음해 결국 백제를 멸망시키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백제의 멸망은 왜가 한반도 남쪽지방에서 이익을 얻을 수 없음을 뜻하며 결국 왜는 663년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전쟁(3차례 기벌포 전투) 결과 동아시아는 큰 변화를 겪는다. 당나라는 신라의 3국 통일을 인정하고 신라는 당나라 중심의 질서에 가입하는 전제하에 당나라는 한반도에서 물러났다. 왜는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내부 개혁과 중국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백제, 고구려 이주자들로부터 한반도 양식의 견고한 성벽을 쌓는 등 방어에 주력했다.

 

당나라에 보낸 왜 사신, 신라·백제 전투 영향

▲고미야 히데타카 계명대학교 국제지역학부 교수
일본사에서 백강 전투는 신라·당과 백제·왜의 전투에서 패배한 왜가 당을 모범으로 한 율령국가 형성을 급속히 추진하는 계기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동안 백강전투는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한 왜의 원군파견이라는 줄기에서 해석돼 왔다. 이는 왜-당 관계와 왜-백제 관계를 별개의 문제로 삼아 외교를 각각 분석하는 시각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왜가 당나라에 파견한 견당사(왜가 당나라에 보낸 사신) 파견 사례를 통해 당시 왜-백제·신라 관계를 재해석 했다.
그 결과를 보면 먼저 당나라 이전 견수사(수나라에 보낸 사신)파견에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번째로 630년대부터 파견된 견당사에는 신라와 백제 간의 전투가 큰 영향을 받았다. 대외정책에 소극적인 신라의 도움을 받아 견당사를 파견하며 균형외교를 전개했으나 신라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지향하면서 신라·백제에 대한 균형 외교 방침은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세 번째로 653년 경 왜는 백제를 견당사 파견 도움의 대상국으로 삼았고 659년에는 친백제외교를 펼쳤다. 이 때문에 사신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했고 백제를 공격하려는 당나라의 정보를 얻을 수 없게 됐다. 결국 왜의 백강전투 참가는 균형외교의 파탄에서 빚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운명 가름한 세 차례 기벌포 전투

▲박영철 군산대 교수
한반도가 거대하고 지속적인 중국문명에 동화되지 않고 한반도 나름의 고유 문명을 지켜온 것은 반도국가로서의 해양성이라는 특성에서 유래하는 면을 부인하기 어렵다. 676년의 기벌포 전투는 이런 의미에서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 민족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는데 그것은 660년 거대 제국 당과 한반도의 소국 신라의 합작에 의한 기벌포 상륙에서 시작하여 676년 신라가 당의 군대를 기벌포 전투에서 패퇴시킨 데서 완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통일 전쟁 중에 있었던 대규모 국제전쟁은 모두 해전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660년 기벌포 상륙 후에 벌어진 웅진강구전투, 663년 백촌강 전투, 676년 기벌포 전투는 모두 해전으로 한반도의 운명을 가름한 결정적인 전투였다. 이것은 곧 한반도가 해양성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1899년 군산 개항은 옛 황해의 해로를 자유롭게 세계를 향해 개방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개항의 실세가 일본이라는 점이 민족사적인 관점에서 비극이긴 하지만 군산이 대외 거점이 된 것은 삼국통일 이래 오랜 역사적 필연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왕조에 와서 대륙편향적인 역사가 지속됨으로 인해 소홀시 된 금강하구의 역사는 해양사의 연구가 강조되는 금일의 시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잊혀진 해양과 지방의 강해도시 군산의 역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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