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지산, 삼봉산, 적상산 등의 혈액 같은 핏물들이 숨길을 찾아 흘러내려 남대천을 이룬다. 이 무주 남대천을 흐르는 맑은 정기와 같은 혈액들은 실상 모두 덕유의 것이다. 덕유(德裕)는 말 그대로 너그러움이 층층이 쌓인 모습으로, 큰 산을 이루어 덕유산이라 하였다. 실로 덕유산은 낮지 않다. 덕유는 소백산맥의 중심체로서 반도 남부를 동서로 나누며 삶의 형태를 구분하였다. 그래서 이 땅의 인심들을 아울러야 했던 덕유산은 중봉, 무룡산, 덕유평전, 삿갓봉 등 1400m가 넘는 큰 산 들을 거느려야 했다. 서릿발처럼 냉정하고, 맑기는 10월의 하늘빛을 닮은 남대천이 또한 그 심중을 담아 무주 읍내리를 흘러 금강 품에 안긴다.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폭이 넓은 물길을 붙잡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 물을 옛 백제 때는 적천(赤川)이라 하였다 한다. 오늘날 우리가 남대천(南大川)이라 부르는 이 물길이 적천이었다. 세상에 붉은 물이 있을리 없으니 이는 분명 덕유의 핏물처럼 흐르는 정기를 그렇게 불렀을 터였다. 그 의미는 다시 붉은 빛이 가득하다는 무주(茂朱)라는 이름으로 표상되었다. 덕유산이 실상 붉은 빛을 품고 있는 산이라는 뜻일 텐데 이는 아무래도 신성한 태양의 산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그렇더라도 덕유산은 그 깊은 내력을 가슴 안에 숨기고 이름을 덕유(德裕)라 하고, 그 머리를 불심(佛心)을 상기시키는 향적봉(香積峰)이라 부르게 하였으며, 더불어 턱밑에 백련사(白蓮寺)를 두었다. 그 마음을 읽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렇더라도 그 깊은 심중을 헤아리려 한 젊은이가 있었다.
 

무주 읍내리에서 태어난 김환태(金煥泰 1909-1944)는 남대천이 마치 놀이터인양 어린 시절 대부분을 그 물에 몸을 담고 놀았다. 그래서 그의 육신은 점점 붉은 빛으로 젖어갔다. 적천의 물빛이 그의 몸에 베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태어난 곳이 한 호흡에 내려설 수 있었던 읍내리 물길 옆이었기 때문이다. 무주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덕유가 내려 보낸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놀았다. 김환태는 덕유의 물길을 바라보는 일 말고는 이곳에서 흥미 있는 놀이는 없었다. 철따라 그 놀이는 달라졌지만 때로는 물위를 걷고, 때로는 물에 잠기며 물빛의 의미를 읽어갔다. 그러나 그에게 내려진 운명은 그리 쉽게 읽어지지 못하였던가 보다. 그가 훗날 쓴 글에서 “예전 놀던 산으로 시냇가로 싸다니었으나 나의 괴로움은 좀처럼 멎지를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적성산에 올라가서(중략) 하룻밤을 새워보려고 하였습니다.”(적성산의 한여름 밤. 조광 1936.7) 사람들이 적성산(赤城山)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적상산(赤裳山)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산은 마치 덕유의 심장처럼 붉은 빛을 하고 무주를 상징하고 있다. 같은 글에서 “우리 고향 어린이들은 어머니 품에 안겨 젖을 먹다가는 이 산을 손가락질하며 어머니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모와 마음이 뛰어나게 아름다움은 이 산의 정기를 타고 이 산의 애무 속에서 자란 까닭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의 심성과 의지의 뿌리가 어디에서 비롯되어진 것인지를 밝히고 있음이다.
그렇게 성장하며 무주에서 전주로, 서울로 다시 일본으로 젊음의 유랑을 떠나 세상을 읽어갔다. 그렇게 얻어낸 것이 문학이었다. 그의 유랑 길에서 당대 문학인으로서 정지용(鄭芝溶), 이광수(李光洙) 등을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덕유가 준비해 둔 필연이었을 것이다. 그는 문학이 세상사를 이야기하고 문학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얻었다. 마치 적천이 오랫동안 골짜기 골짜기를 돌아가며 금강과 함께 세상의 찌꺼기들을 씻어 먼 바다로 흘려보내버리는 것처럼 문학이 그렇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그래서 문학을 이야기하기로 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순수문학과 순수 예술주의를 지키려한 비평가라 했다. 문학과 문학인이 순수하여야 한다는 예술주의를 옹호했던 그의 태도를 중요시했다. 문학을 모르는 필자가 깊게 언급할 입장은 아니지만 김환태는 1930년대 이후 한국 문학비평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비평태도에 대해 주관에 철저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순수한 주관이어야 순수한 객관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를 “진정한 나를 보는 것은 진정한 그를 보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서 문예비평은 “저급한 독자를 계몽하기 위하고 또는 천재의 탈선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고 했다. 그가 비평을 통해 하고자 하였던 의지는 덕유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김환태는 작가와 비평가 그리고 독자가 순수한 내면으로 만나야 한다고도 하였다. 순수와 예술은 실로 같은 몸이라 할 것이다. 그가 굳이 예술지상주의자임을 자처하며 사랑과 생명을 순수에 담아야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주장은 실상 당대의 어지러운 세상을 꾸짖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 땅이 식민지로 전락해 백성들의 고난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던 현실을 외면하던 문학을 질타한 것이다. 섣부른 정치와 이념이 문학을 도구로 삼아 이 땅의 고단한 희망을 더욱 어둡게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인생에 대한 사랑과 예술에 대한 사랑을 융합시키고 생활과 실행의 정열을 문학과 결합시키는” 일이 그가 받은 천명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는 실상 문학을 통해 세상을 꾸짖고자 하였고 문학이 순수를 지향해야만 세상은 본래의 생명체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이는 그 자신이 비평가로서의 문학인이 되고자하였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학의 옷매무새를 고쳐 잡으려는 태도를 가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슴은 항상 적성산처럼 뜨거웠다. 
한 낮의 태양 빛처럼 잠시 혹은 적천의 물빛처럼 뜨겁게 살다간 그가 호를 굳이 눌인(訥人)이라 하면서 스스로 입을 조심하고 자세를 경계하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은 그가 말한 대로 “산허리가 성벽 같고, 가을이면 빨간 치마를 두른 것 같은 적성산”의 어머니 마음이고 또한 덕유의 내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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