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뼈로 제방을 쌓아라

<전북예찬: 30.김제벽골제, 모악의 은총이었다> 이철량 교수l승인2016.05.09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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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선,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그래서 사실 어떤 막연한 미래를 헤집어 보는 환상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평선은 그렇게 아득하고 멀리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지평선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호남평야에서만 가능하다. 만경평야라고 부르기도 하는 호남평야에는 지평선이 있다. 땅과 물색과 하늘빛이 어우러지는 호남의 지평선은 오늘도 모호한 안개 속에서 망망하기만 하였다. 호남평야의 중심인 김제 들녘 한 가운데서 바라보는 지평선은 참으로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들녘에는 짙은 초록 물을 가득 머금은 보리들이 탄탄하게 여물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촉촉한 습기가 짙게 배어 있는 논두렁들은 서로 봄 햇살을 먼저 받으려 보채는 듯이 등을 대고 돌아 누워있다. 농부의 손길이 그리운 5월 첫 주의 김제들녘이다. 김제들녘을 김제평야 혹은 금만경평야라 부르기도 한다. 김제평야는 완주 동상에서 출발하여 군산과 익산 그리고 김제를 아우르며 마치 나팔모양의 하구를 만들고 서해로 나아가는 만경강과 내장산에서 발원하여 부안과 김제를 구분하며 또한 서해로 흘러드는 동진강 사이를 말한다. 이들 두 강이 함께 이루어낸 넓디넓은 들, 한반도 백성들의 삶을 책임졌던 이 곳 그리고 지평선이 보이는 그 중심에는 벽골제가 있다.

사실 김제평야에는 태백의 염원이 소백으로 내려와 노령의 끝자락에서 머무는 모악의 커다란 배려가 있었다. 모악(母岳)은 생명의 여신이며, 이 땅을 거두어 준 어머니였다. 그의 소원이 원평천을 통해 김제평야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한반도 백성들의 풍요와 평안이었으며 벽골제가 그 표상으로서 원평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원평(院坪)은 평평하고 너른 집이라는 말로 모악의 거처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이곳 모악산 정상에서 발원하여 금산사를 들러 금평저수지에 머물다 흐르는 원평천은 황산을 사이에 두고 역시 모악산 자락 금구에서 출발한 두월천과 용성에서 만나 동진강 하구로 들어선다. 이 물길은 참으로 여유롭고 넉넉하며 한가하게 흘러갔다. 사실 이 두 천은 모악이 내려 보내는 젖줄이며 은총이다. 모악은 땅의 여신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 존재하는 뭇 생명들을 거두는 지모(地母)신인 것이다. 그녀의 젖줄이 김제들녘을 적시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한반도에 내려 보내는 축복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들녘을 그리워하였다. 사람들이 원평천을 붙잡고 모악산 품안에 몰려든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의 의지를 받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시험이었고 또한 모악의 요구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큰 수해로부터 벽골재를 지키는 일은 어려운 시험을 치루는 일과 같았다. 사람들은 모악이 내려 보내는 생명수를 가두기 위해 9번이나 제방을 쌓고 또 쌓았어도 폭우의 신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빌고 또 빌었다. 그래서 당시 모든 사람들의 꿈에 나타나 “푸른 뼈로 제방을 쌓아라.”고 했던 신령도, 그리고 이 신기한 꿈을 풀어 “푸른 뼈는 말의 뼈”라고 일러 주었다는 스님도 모두 모악의 현신이었을 것이다. 푸른 뼈로 쌓은 둑이라는 벽골제(碧骨堤)는 그렇게 이룩되었다. 말의 뼈가 푸른빛인지 실제를 알지 못하나 뼈의 인이 흙을 단단하게 한다하니 옛사람들의 지혜는 틀림없이 그녀가 가르쳐 준 것이었다. 부량면 월승리에서 포교리까지 옛 기록으로 일천팔백보(一千八百步)라 하니 실제 지금의 길이로도 커다란 공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해가 330년 백제 비류왕 27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한 어떤 사람들은 벽골이 볏골 즉 벼가 많이 나는 고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결국 벽골제는 벼농사를 위한 이 땅의 첫 업적이었다.

벽골제가 모악의 의지를 받드는 하늘의 뜻이었다는 것은 의녀 단야의 설화에서도 확인된다. 벽골제 주변에 살던 흑룡의 심한 심술로 제방이 무너지곤 하였다. 태수 유품은 원덕랑과 함께 보수공사를 하였으나 벽골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흑룡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하였다. 태수는 원덕랑의 약혼녀 월내를 제물로 점찍었으나 원덕랑을 사모하였던 태수의 딸 단야는 “수많은 백성들이 피땀 흘려 쌓은 제방이니 제발 헐지 말라”고 당부하고 스스로 제물이 되어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단야라는 효성과 희생의 상징은 본래 모악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모악의 품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미륵이 머물고 있었던 것을 보아도 그 심중을 헤아릴 수 있다. 또한 조연벽장군 설화에서 “벽골제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용추에는 백룡이 살았고, 부량의 용골부락 남쪽 연포천에는 흑룡이 살았다”는 이야기들은 벽골제가 인간들의 세계가 아니었음을 암시한다. 벽골제가 단순한 제방이 아니었음이다. 그것은 김제평야의 농사가 사람들의 일이 아니라 매년 신들의 씨뿌리기 놀이였다는 것이다.


이철량 교수  jeolla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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