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맑은 햇살은 산천 곳곳에서 피고 있었다. 아직 찬기가 진한 이른 봄이었지만 김제와 부안으로 이어지는 너른 들녘을 흠뻑 적시고 있는 햇볕은 분명 새로운 것이었다. 오만가지 생명들이 앞 다투어 대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산수유의 노란 물과 산자락 곳곳에서 흐드러져 피어있는 매화는 이미 이 땅이 이른 봄 품안에 있음을 알려왔지만, 봄물은 아무래도 버들잎의 연녹색에서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감동의 눈물이며 촉촉한 대지의 호흡이기도 하였다. 짙은 황토 빛 피부를 훤히 드러내고 나른한 봄 햇살을 받아내고 있는 부안의 나지막한 산자락이 짙은 바닷물 빛 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은 마치 오래된 그래서 편안한 연인처럼 정겹다. 그렇게 여유롭고 한가하며 생글해 보이는 봄을 따라 아주 작고 낡았을 고기 배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며 줄포에 들었다. 오래 전에는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는 창포 꽃이 천지에 가득한 바닷가여서 줄포라고 불리었다는 그 시절 그 모습을 그리워하며 달렸다. 그러나 실상 줄포(茁浦)는 창포 꽃으로 생겨난 이름이라기보다 온갖 작은 생명들이 피어오르는 곳이라는 의미였었다. 그러니까 단지 육지의 어느 작은 풀꽃이라기보다 바다와 육지 그리고 그사이 갯벌의 모든 생명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줄포는 실상 새로운 생명이 분출하는 특별한 곳이며 또한 봄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바둑신선이 된 조남철이 굳이 줄포에서 태어난 것도 이런 연유였다.

줄포는 조남철과 같은 선인을 잉태하기에 가장 알맞은 땅이었다. 조남철의 생가가 있는 줄포 오포리는 아마도 그 시절에는 무척 번잡하였을지도 모른다. 번성한 항구의 뒷길은 언제나 그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정히 다듬어진 누추한 여느 시골 길과 다름이 없었다. 이제 곰소만 바닷물도 멀찍이 물러앉아있고 줄포와 바다 사이에는 갈대들이 무성했다. 그나마 천배산 자락에서 흐르는 물길이 줄포와 바다를 이어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항구의 옛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나마 바둑공원에 들어 곰소만을 내려다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곰소만은 마치 만나지 못하는 연인처럼 부안의 변산과 고창의 선운산이 마주보고 있는 그 사이의 바다를 그렇게 부른다. 변산은 근육이 단단하고 골격이 잘 다듬어진 남성의 상징이고 선운산은 고운 옷을 잘 다려 입은 부드러운 모습의 여성적인 산이다. 이 둘이 만나려면 줄포에 나서야 한다. 줄포는 마치 곰소만을 테이블 삼아 두 남녀의 만남을 주선하는 매파처럼 자리하고 있다. 그 둘의 만남은 아마도 줄포 앞 곰소만 갯벌에서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가 어쩌면 창포 꽃이 가득한 진한 봄날이었을까 아니면 오늘처럼 때늦은 냉기가 살짝 덮여있는 이른 봄, 연록 빛 버들잎이 봄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그 시간이었을까? 그렇더라도 줄포에는 연중 새로운 생명들로 가득하였던 모양이다. 조남철도 지난 1923년 11월 30일에 태어났다. 초겨울 산산한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던 시간이었다. 그는 바둑으로 신선이 되기 위해 분주했던 봄 햇살보다 오히려 바람이 청명한 초겨울 날을 잡았다.

사실 바둑은 신선들의 놀이였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선인들로부터 바둑을 얻어 놀이를 시작하였는지를 아는 이는 없는 것 같다. 그렇더라도 우리 옛 그림들 속에서는 소나무 아래 바둑판을 놓고 놀았던 인물들이 마치 신선인양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9개의 날줄과 씨줄의 엮임 속에서 흑백의 싸움은 실상 대결이 아니라 집합의 놀이이다. 흑백은 음. 양의 표상이고 음. 양의 겨룸은 그것이 결코 대결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둑은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바둑을 위기(圍棋)라 했다. 바둑돌을 통해 사냥놀이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사냥은 곧 신들의 놀이였다. 바둑을 수담(手談), 망우(忘憂)' 혹은 좌은(坐隱)이라고도 불렸다 하니 모두 선인들의 행사였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바둑을 통해 이기고 지는 승. 패의 길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선들의 자기 수양을 익히는 고상한 놀이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조남철의 삶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조남철은 한국의 바둑을 위해 민족의 역사상 가장 험난했던 시절을 살았다. 그는 줄포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바둑을 익혔다 한다. 그리고 1937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바둑의 세계에 들었다. 그렇게 하여 일본의 기원 전문기사가 되었는데 이는 비로소 한국 최초의 전문 바둑기사로서 존재하게 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곧바로 서울에 한성기원을 설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기원으로 발전하여 한국 바둑의 맥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일제와 한국동란 등의 매우 위태로웠던 삶 속에서도 오직 바둑에 의지해 살아왔던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신선처럼 담백한 것이었다. 그가 나이 서른셋에 최초로 “위기개론”이라는 바둑 입문서인 교재를 썼고, 그리고 “바둑에 살다”등 바둑에 관한 26권의 연구서를 발간하였다. 사람들은 그를 “걸어 다니는 바둑법전”이라 불렀다고 하나 실상 그는 이미 “바둑의 신선”으로 존재했었다. 바둑을 어떻게 하면 잘 둘 수 있느냐는 물음에 “바둑 잘 두는 법, 그런거 있으면 나 좀 가르쳐 주게”라고 했다는 일화는 그가 단순한 바둑지식에 머물러있지 않고 바둑의 도(道)에 입문해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바둑 9단이라 하고 혹은 8단이라 불리기도 하나 실상 그에게는 이러한 숫자는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홉(9)의 숫자는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 한국바둑에서 이 경계를 넘어 절대세계에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국기원과 동아일보가 지정한 대국수(大國手)라는 칭호에서 찾을 수 있고, 이는 아직까지 그가 유일하다. 또한 그가 키운 바둑의 큰 별들 김인, 조훈현, 윤기현, 조치훈 등이 입신의 문턱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틀림없이 하늘의 점지가 있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 역사가 줄포에서 피어난 것이다. 줄포의 바둑공원이 온갖 생명들이 우글거리는 곰소만 갯벌에서 자연생태공원으로 불리며 바둑 새싹을 키워내고 있는 연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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