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남천과 오수천이 내려와 만나는 곳에 임실 오수가 있다. 들은 넓지 않으나 잔잔하고 포근하며, 남도로 뻗어가는 길목이어서 그 끝은 헤아리기 어렵다. 찬 기운을 가득 담은 북풍 또한 이 골을 따라 멀리 남해로 내려가며 겨울을 엮어가고 있었다. 겨울 날씨라고 하기에는 아직 포근하고 햇살은 낯간지럽게 부드럽다. 초겨울 햇살을 밟아가며 전주 남원 국도를 달려가다 보면 뜻밖에도 개를 대리고 서있는 동상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이제 오수에 다다른 것이다. 둔남천의 억새와 잡풀들이 벌써 겨울옷을 갈아입고 한적하게 모여앉아 지난여름을 예기하고 있었다. 메마른 장마 이야기며, 풍성했던 가을걷이로 오수의 일 년을 되짚고 있는 듯하였다. 오수는 이 둔남천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으며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그러나 이곳은 둔남천과 오수천이 만나는 삼각지대로 풍요로운 고을이었다. 남으로 내려가는 사람들 혹은 한양 길을 떠나는 사람들 모두 여기 오수에서 잠시 짐을 풀었었다. 그래서 시장은 항상 붐볐고, 지금처럼 그 때도 국밥집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그 옛날에도 오수 보신탕집은 소문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오수가 지금처럼 작은 마을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성수산이 내려 보내는 둔남천과 팔공산에서 흐르는 오수천이 만나서 이루어진 오수 끝자락에는 원동산이라 불리는 낮은 언덕이 있다. 이제 갓 피기 시작한 어린 처녀의 젖무덤처럼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가지고 있지만, 마치 두 천이 힘을 모아 만들어 놓은 듯 기세는 당당해 보이는 윤기가 흐르는 언덕이라 할 만하다. 이곳에는 참으로 낯설고 특이한 커다란 비석이 아름드리나무들을 거느리고 당당하게 서있다. 그 규모나 생김새가 웅장하고 매끄럽다. 뿐만 아니라 또한 엄정하게 세워진 비각 안이 다소 좁은 듯 세워져 있다. 그런데 사실 비문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담기지 않은 이 비석은 개비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는 개비임이 분명하고, 또한 오수(獒樹)는 개 나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고을이다.

사람이 개나 다른 동물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믿는 것은 어쩌면 인간들의 큰 오만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분명 근거 없는 그러한 믿음위에서 세상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믿음 때문에 다른 동물들이 미개하고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하는 미물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지속해 왔다. 오로지 인간만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다는 오래된 믿음은 오수에서 허망하게 무너지고 만다. 오수는 그렇게 탄생했다. 먼 고려시대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최자(崔滋 1188-1260)가 1230년에 썼다는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있는 오수 개에 대한 이야기가 전한다. 때는 훨씬 거슬러 신라 후반 9c경 거령현(居寧縣)에 살았던(지금 지사면 영천리) 김개인 이라는 선비는 개를 무척 사랑하였다. 그래서 외출할 때면 자주 함께 나들이를 하곤 하였다. 어느 날 그는 동네잔치에 나가 술을 하게 되었고 만취가 되어 돌아오던 길에 길가 풀숲에서 잠이 들었다. 때마침 들불이 일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개가 인근 개울에 나가 몸에 물을 묻혀 뒹굴어 불을 끄고 주인을 구했으나 안타깝게도 개는 힘이 다해 목숨을 읽고 말았다. 잠에서 깬 김개인은 개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걸 알고 정중히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표식으로 지팡이를 꽂아 두었는데 뒤에 지팡이가 자라 큰 나무가 되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개가 큰 나무가 되어 환생하였다고 믿어 이곳을 오수라 하였다하며 오늘까지 그렇게 불리고 있다. 개와 오수의 이야기는 이처럼 최자의 글로 전해지며, 마치 먼 옛날의 설화처럼 시간을 쌓아 천년을 넘어가며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오수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설화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안타까움이 컷다. 그러나 천년의 염원은 결코 오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것이 원동산에 서있는 개비이다. 오수 사람들의 끈질긴 기다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오수천 물길을 다듬던 중 우연히 커다란 비석 하나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금성처럼 오수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이 없어 평범한 듯 비범한 체구였다. 투박하기로는 영락없이 부잣집 상머슴처럼 보였으나 그 위풍은 실로 당당했다. 키는 자그마치 2m가 훌쩍 넘었고 폭도 1m가까이 되는 실로 커다란 비석이었다. 그러나 그 몸 어디에도 개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애를 태웠지만, 오수에 오랫동안 터를 두고 살아왔던 사람들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는 분명코 개비가 나타난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 개 무덤을 조성할 때 함께 세웠던 비석임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소중하게 원동산에 모셨다. 그 위엄에 걸맞는 비각도 세웠다.

개비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다만 하늘을 보고 누워있는 듯 한 개의 형상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이는 분명코 개가 천국에 오르는 모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주인을 구한 개에 대한 인간의 도덕심이 발휘된 것이리라.

오수천은 남덕유에서 뛰쳐나온 팔공산(八空山) 자락에서 흘러 모아진다. 팔공은 어쩌면 팔성(八聖)이나 팔선(八仙)으로 읽어야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사실 존재하고 있다고 믿어왔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어떤 특별한 존재에 대한 믿음과 믿고 싶은 마음을 우리는 덕성이라고 생각했다. 그 심성을 내려 보내는 곳이 덕유산(德儒山)이라 믿었다. 오수천이 팔공산에서 내려 받았던 깊은 의미가 오수에서 피어난 것일 것이다.

중국의 팔선은 종종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팔공산에서 머물던 팔선들은 오수천을 따라 섬진강으로 들어가 남해로 가려했을 것이다. 그 팔선이 잠시 오수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중 한 선인이 착한 선비 김개인의 개로 남아 주인을 섬기었다. 사람들에 의해 미물로 여겼던 개가 하늘로 오르게 된 연유가 그러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다. 인간이 어찌 미물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거령현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개비를 세우고 하늘 길을 열어 주었다. 그 마음이 오늘 원동산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겨울바람이 차다해도 비각 머리에서 피어나는 잔바람이 훈훈한 감동을 피운다. 훗날 개비를 위해 심었을 느티나무는 세상을 가릴 만큼 크게 자랐고 그의 잎은 겨울 냉기를 보듬듯이 원동산을 덮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을 길러야 하는지 원동산 개비에서 물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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