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늦은 가을비가 금강을 어루만지듯 간지럽게 실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조용하고 적적한 금강은 그나마 지루함을 덜어 내기에 딱 맞는 날씨였다. 넓디넓은 큰 몸에서 군실대는 잔비에 잔잔한 반응이 일었다. 작고 예리한 아름다운 물결이 마치 비단무늬처럼 연속해서 그려지고 있었다. 하늘은 가깝게 내려와 두꺼운 솜이불을 씌운 듯 금강을 누르고 있는데, 철 이른 새들이 가끔 금강에 말을 걸고 있었다. 강가 마른 풀잎은 그 말을 알아듣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하고 있는 그곳이 11월 막바지의 곰개나루 풍경이었다. 아직 철새 떼가 몰려들기에는 이른 철이어서 메마른 갈대들만 무성하게 줄지어 금강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그 옛날 번잡했던 곰개나루의 꿈을 꾸는 듯 금강은 가끔 잔바람에도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곰개나루는 함라산 칠목고개를 내려와 마주 보이는 산 넘어에 있다. 마치 투박하고 커다란 엉덩이를 뒤로하고 엎드려 있는 곰같은 낮은 산이였다.  

이름은 영혼이 되어 역사를 남겨둔다고 한다. 곰개나루도 그러하다. 곰개나루는 지금의 웅포를 일컫는 옛 이름이며 같은 말이다. 아마도 곰개나루는 반도의 역사를 꿈꾸며 만들어진 이름일 것이다. 곰개는 곰과 물이만나 이루어진 말이다. 실제로 곰이 물을 먹는 형상에서 비롯되어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길이 걷다가 물을 만나는 곳을 나루라 하였으니 그리 틀린 조합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고 한 들 강물에 발을 딛고 엎드려 있는 곰의 형상만으로 이름이 얻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곰은 민족의 상징이고 신앙이다. 환웅이 웅녀의 청을 받아들여 결혼을 하고 단군을 낳았다는 우리의 곰 설화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것이 그렇다. 아마도 곰의 신앙은 멀리 소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믿어지지만, 그것 또한 사실이라면 한반도는 인류가 꿈을 찾아 나선 이후 정착한 마지막 성지였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반도에는 태백이 있고, 태백에서 웅녀가 탄생했다. 그것이 어찌 단순히 떠도는 옛이야기로만 이어질 일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한민족은 쑥과 마늘을 먹고 인간이 된 웅녀의 후손이라는 믿음은 곳곳에서 이어진다. 곰개나루도 그러했다. 이렇듯 쉴 곳을 찾아 수만리의 먼 길을 걸어온 곰이 이곳에서 금강의 물을 마시고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예삿일은 아니다. 비단같이 매끄럽고 고운 물, 그래서 금강이 된 깨끗한 물이 아니던가. 성수(聖水}라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곰이 금강물을 마시는 것이야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일일 터이다. 어쩌면 사람이 살기 이전부터 곰은 어떤 의지를 펼치기 위해 이곳에 정착하고 꿈을 이루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 때 그 날들은 곰개나루가 무척이나 분주하고 바빴을 것이다. 곰개나루는 바다와 대륙이 직접 만나기 부끄러워서 금강을 앞세워 만남이 이루어졌던 곳이었다. 언제나 결 좋은 비단으로 오색을 꾸미고 오늘처럼 잔잔한 바람을 타고 짠내를 풍기며 의기양양하게 들어오는 배에는 낯설고 신기한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아마도 유리구슬이나 금동으로 빚어진 번쩍거리는 장신구들, 그리고 각종 진기한 그릇들이 금강을 타고 들어왔다. 연화문과 포도문양 등도 함께 배에 실었다. 참으로 먼 길을 오랫동안 달려온 그것들은 멀리는 지중해안의 페르시아에서 들어오는 것들이었을 것이고, 또는 가까이는 인디아 등에서 왔을 터이다. 그러나 남지나해의 멀고 험한 뱃길을 돌고 돌아 들어오는 그 화려하고 진기한 것들만 곰개나루를 드나든 것은 아니다. 반도의 유려하고 새로운 것들 또한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또한 남중국해를 향해 멀리 멀리 뱃길을 떠났다. 그곳이 지금의 웅포, 곰개나루였다.

그러나 이처럼 아득한 먼 물길을 찾아 떠나는 사내를 보내는 아낙의 기도는 참으로 무겁고 구슬펐을 것이다. 그나마 그 슬픈 기도를 엮어 금강에 내 걸 수 있었것은 용왕사 덕분이였다. 지금은 덕양정이라 불리면서 서있는 팔각정이지만, 원래 이곳은 곰개나루의 길잡이로서 용왕제를 모신 당꼬쟁이라 불리웠다. 당꼬쟁이는 제를 올린 무속인을 일컫는 말인 듯하다. 매해 정월보름이면 이곳에서 용왕에게 빌었다. 곳곳에서 제물을 장만하여 함께 빌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금강에 띄우는 편지요, 기도였다. 용왕은 금강에 머물 것이지만 틀림없이 미륵산 옆 용화산에서 곰개나루를 지켜보라고 내려 보낸 사제였을 것이다. 이제 당꼬쟁이도 금강물을 따라 먼 바다로 떠나갔고, 그 자리에는 짙게 금강물빛을 담은 소나무 한그루와 나이가 지긋한 팽나무들이 옛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나마 예나 다름없이 금강을 내려다 볼 수 있어 위안이 되었고, 매일 찾아오는 붉은 저녁노을에 옛 시절을 태워가며 오늘까지 버티고 있었다. 이제 당꼬쟁이도 이름만 남았다. 이러한 곰개나루는 태백이 덕유를 내려와 미륵산에 머물다 마치 춤추듯 넘실대는 산세를 따라 서해로 나아가려는 끝자락에 있다. 함라산 배꼽처럼 자리 잡은 곳이다. 그 산새의 끝자락을 붙잡고 함께 버텨온 것이 금강이었다. 그 자리에 곰과 용이 함께 머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만 용왕사는 곰의 코 끝에 올라서서 크고 작은 염원들을 거두어 주었다. 그들의 기도와 염려를 안고 들어온 멀리서 온 진기한 것들의 주인들이 지금 함라산 남쪽 끝자락 입점리에 누워있다. 그 화려함의 주인들은 대체 누구였는지 아직도 그 내력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아마도 오래전 백제 이전부터 정착해 세력을 키웠던 한족(韓族)이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모두 백제인이라 불리었다. 입점리고분군이라 불리는 오래된 무덤들은 함라산 남쪽 매끄럽고 높지 않은 그래서 햇살이 가득한 산자락에 길게 자리하고 있다. 함라산은 금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데 아마도 먼 길을 달려 내려온 금강을 맞이하려 미륵산이 내려 보낸 듯하다. 마치 금강을 감싸 안으려는 듯 양팔을 길게 벌리고 금강을 향해 활처럼 휘어져 있다. 또한 급하게 달려 내려온 금강도 이곳에서 쉬어가려는 듯 물길은 넓고 잔잔하여 이곳이 서해인가 싶다. 어쩌면 그 옛날엔 강물이 함라산 밑자락까지 들어와 놀다갔을지도 모른다. 그 물빛이 그리워 어느 군주는 입점리 고분에 들었을 것이다. 황금 빛 찬란한 금관이며. 신발이며 각종 장신구들을 가지고 언제쯤 다시 돌아올 곰개나루의 꿈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사실 곰개나루의 꿈이 아니라 이 땅 한반도의 염원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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