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정해마을은 가을 빛이 넘실대었다. 가을은 신의 축복이다. 우리가 가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신들의 특별한 배려이리라. 윤기 흐르는 달달한 감들이 가을 햇살에 단맛을 삭히고 있는 가을은 대지의 축복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제평야의 황금빛 물결은 가을 축복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오늘도 그 들녘에 생명을 잉태시켜 온 것은 아무래도 내장산 아래 정해(井海)라 할 것이다. 정해를 이곳 사람들은 일찍부터 새암바다로 불러왔었다. 이 새암바다는 오래전부터 이 땅의 중심이었고 생명의 원천이라 믿어왔었다. 정해는 정읍에 있는 우물 이름으로 신궁(神宮)이었다.

정읍사공원에서 싸리재를 넘어 잠시 내려서면 정해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또한 부부마을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어느 사연인들 깊은 내력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곳에는 실제로 크고 우람한 부부나무가 있다. 1676년에 심어졌다는 서로 다른 버드나무와 팽나무가 한 몸이 되어 지금까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반듯한 우물하나가 있어 이 곳을 지금은 정해마을이라 불리나 예전에는 정촌현(井村縣)이라 불렀다. 바로 정읍의 기원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정읍은 정해와 초산(楚山)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자리하고 있다. 혹자는 초산이 정읍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한 때는 잠시 이 초산 안에 성곽을 치고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 역사가 그러할지라도 어떻든 정읍은 아주 특별한 내력이 있었던 곳임에 틀림없다.  내장산의 불출봉에서 서쪽으로 흘러온 산 자락이 아양산을 만들고 그리고 그 끝으로 초산이 있다. 그래서 이 산자락을 사이에 두고 남으로는 용산천이 흐르고 북쪽에는 정읍천이 흘러 이들이 함께 만나 동진강 품에 안긴다. 김제 평야의 가을을 빚어내는 내장산의 생명수는 이렇게 흘러가지만 실상 내장의 배꼽은 정해우물이었다. 아니 사실 이 땅 반도의 배꼽이라 불려 왔다. 배꼽은 세상의 중심을 일컬음이고, 신들이 거처하는 신궁인 것이다.

정해는 우물이 바다와 같다는 말이다. 정(井)은 우물을 말한다. 우물은 대지의 정액이며 생명탄생을 이야기하는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해(海)는 바다로 읽히지만 바다는 부도(浮屠)에서 파생된 언어로 보아야한다. 부도는 언어학자들의 견해를 빌리면 붓다(부처)에서 파생되었으며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한다. 바다는 곧 신들의 세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정해는 신궁이 된다. 우물에서는 끝없이 솟는 맑은 샘물이 넘친다. 샘물은 새 물일 것이다. 밝은 물(泉) 즉 정령을 말한다. 그래서 정해는 이 땅의 생명수인 것이다.

우리 옛 민속에서 바다의 주인은 용이다. 용은 천사 가브리엘과 같다. 태양신의 전령으로 신의 화신이라 읽어야 한다. 그래서 정해는 용들의 고향이며 정해 주변에는 용들의 놀이터였다. 지금 정해마을 옆이 복룡마을인 것은 그러한 연유가 있다.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으로 아마도 정해에서 나와 햇볕을 맞고 있는 것이리라. 옛 사람들은 이곳이 지형적 형상으로 배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고 한다. 이 땅이 실상 바다에 떠 있는 배와 같은 것으로, 하늘나라 즉 신의 세계라 믿어온 것이다. 그런데 이곳 정해에서는 일찍부터 한 여인의 애절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참으로 애달프고 한스런 노랫소리다. 그러나 사람의 인정으로 보면 슬프고 애절한 것이라 할 것이지만, 실상은 생명의 씨를 부르는 즉 잉태를 기다리는 신의 소리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노래를 사람들이 정읍사라 부르며 오랫동안 가슴에 간직해 왔었다. 멀리 일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절절한 여인의 사랑 노래다.

“달아 높이 높이 돋으시어/어기야차 멀리멀리 비치게 하시라/어기야차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시장에 가 계신가요/어기야차 진 곳을 디딜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어느 것에다 놓고 계시는가/어기야차 나의 가는 곳에 저물세라/어기야차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박병채 역)

해는 이미 기울었고 어둠은 진해지는데, 저녁 밥상을 올려놓고 문간에 서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는 노래다. 무심한 달은 구름 속을 들락날락하면서 정신없이 달려가고만 있다. 어쩌면 그녀도 급히 달려가는 달빛을 따라 싸리재 고개에 올라 멀리 정읍을 내려다보며 기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더 멀리 전주까지 내려다보일 것 같은 초산에 올라 노래를 불렀을 지도 모른다. 제발 달님이여 높이 솟아 밝은 빛을 멀리까지 비춰주소서, 저자 거리를 헤매고 있을 남편이 혹시나 진 데를 밟지 않게 해 주소서. 혹시 임이 못 오시면 내가 너무 슬프게 될까 두렵다는 처절한 사랑노래다.

그러나 사랑을 기다리는 것은 땅의 일이다. 여성이 사랑을 기다린다는 것은 생명의 잉태를 위한 신의 사건이다. 남편을 기다리는 이 여성은 새암바다의 상징이고 표상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남편은 곱게 깔아놓은 달빛을 밟고 돌아 올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 생명을 뿌릴 것이다. 그날의 두 사람이 벌린 사건은 지금 우주목(宇宙木) 즉 부부나무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장산이 우리에게 보낸 엄숙한 메세지이였다. 내장산은 두텁고 깊은 비밀을 간직한 산이다. 무엇을 가슴 속 깊이 담아두어 그 이름을 내장(內藏)이라 하였을까마는 실상 그 심중을 헤아리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새암바다에 그 뜻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명이고 상생이며 번영을 일컬음이다. 일찍이 도선국사는 이곳이 한반도 동이민족의 기운을 좌우하는 곳이라 믿어 정해마을을 내려다보는 삼성산에 절을 세웠다고 했다. 삼성(三星)은 삼신(三神)을 말하고 삼천(三天)이라 읽을 수 있다. 새암바다의 물이 오늘도 쉬지 않고 솟는 연유를 알 듯했다. 그리고 그 표상을 오늘 우주목에서 보는 것이다. 부드럽고 유려한 여성적인 버드나무와 우직하고 질박한 남성성의 팽나무가 한 몸이 된 부부나무가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이후 이 마을에서는 한 번도 가정에 불미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것이 자그마치 300여년이 된다. 부부나무 주변에는 마치 번성한 자손들처럼 건장한 나무들이 자라면서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에서 내장산 불출봉을 바라보면  한 여인의 곱고 고요한 얼굴이 지긋이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푸르고 짙은 맑은 가을 하늘이 오늘따라 더욱 깊어 보이는 것은 여인의 얼굴이 참으로 고상한 탓이다. 이 가을마저도 이 땅의 번영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기다림의 표정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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