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마제에서 어머니는 국화를 심었다. 햇살이 귀엽고 부드러운 이른 봄날이어야 했지만, 썰썰했던 날씨에도 국화 한포기를 심었던 이러저러한 어머니의 속 깊은 뜻을 아는 자식들은 없었다. 그날도 봄을 쪼아대는 소쩍새소리와 짝을 만나야 했던 뻐국이의 애달픈 사연이 절절했던 그 봄이었다. 그러나 그 봄은 따뜻하지 않았다. 어찌 늦은 겨울 탓이라 할까? 칼바람이 불어대는 망국의 시절이었다. 초가 단간이었던 마당 한 켠에 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을 먹고 국화는 결국 꽃을 피웠다. 서정주는 나이 어린 마음에도 소요산 자락 어느 모퉁이에서 모난 산돌하나 어머니의 국화 옆에 놓았다. 그리고 그길로 그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연유를 세월이 한 참 지난 후에야 알듯 했다. 그렇게 떠난 질마제는 바람의 고향이었다. 산바람과 바닷바람이 서로 그리워하는 작은 골짜기였다. 그는 그의 시“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바람과 갈매기가 들려가는 서쪽 바다의 친구였다. 바다와 손잡고 한시도 떨어져 지내 본적이 없는 소박한 들녘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아마도 질마제의 바람은 아닌 듯했다. 이 땅 구석구석에 불었던 지긋지긋한 일제의 서릿발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마을 질마제에도 며칠 전 서리 소식이 왔다. 

태백산 머리에 서리가 내렸다는 소식이 왔다. 마치 선운사 어탁이 요란한 소리로 세상 문을 열듯 그렇게 소란스럽게 태백이 알려왔다. 이 땅에 서리가 내렸다는 소식은 벌써 가을이 많이 지쳐있음을 알려오는 것이었다. 가을은 지난 봄 부터 뜨거운 햇살을 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제 가을은 잠시 쉬어가야 했다. 커다란 영광으로 여유를 맞이해야 했다. 그것은 넉넉함이고 화려한 한 숨이다. 그래서 서리는 아주 먼 곳에서 부터 달려 태백에 머무른 것이다. 또 다른 개벽이 오려나. 서리는 태백의 정령이 되어 가을걷이를 위해 분주하리라. 그러나 늦은 가을은 서릿발이 더 날카로워지기 전에 한송이 국화꽃으로 찬란히 세상을 수놓을 것이다. 언제나 노란 국화 향은 그렇게 태백의 서리 소식을 받아들고 핀다. 마치 그날 지난봄에 서울로 떠난 점례누나가 가져온 윤기 흐르는 선물보자기처럼 그렇게 설레이게 피는 것이다. 맏이였던 누나가 학교를 마다하고 굳이 서울로 떠난 건 제비새끼처럼 입만 대고 있었던 동생들 탓이었다. 어린 동생들만은 기필코 아버지의 굽은 곱사등을 힘겹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어른스러운 각오였다. 어느 왜인 집에서 잘 지낸다는 누이는 수심마저 감출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떠났던 누나가 검정고무신 하나 곱게 싸서 머리맡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고향마당 질마제의 흙바닥처럼 거칠었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서리 소식은 그 때 누이소식처럼 그렇게 반갑게 왔다. 태백의 서리 소식에 어쩌면 짠내가 깊게 배어 있는 소요산자락 질마제에서 국화를 만날 수 있을 듯했다. 소요산은 질마제를 감싸고 수강산과 마주하고 있다. 그곳이 서정주가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에서 노래했듯 _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를 남기고 떠난 그곳에 들렸다. 국화를 만나는 것은 이생에서 다시 그를 만나는 것이었다.

태백의 서리가 질마제에서 국화로 피어난 연유가 새삼스럽지 않다. 아마도 곤륜산에서부터 먼 길을 걸어 찾아든 그곳이 소요산이었다. 소요(逍遙)는 아득하고 멀다는 뜻이나 태백의 의지와 서해의 여유가 만나는 뜻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질마제에서 국화가 피는 연유가 이렇다. 그것을 민족의 꽃으로, 그리고 희망으로 가꾸고 꽃 피워냈던 서정주의 글이다. “국화와 산돌”에서 -(생략)어머니가 심어 피운 노란 국화꽃, 그 밑에다 내 산돌도 놓아두고서, 아침마다 물을 주어 길렀습니다,- 어머니가 심은 국화가 서정주 자신이란 것을 그는 익히 알았던 것이다. 땀 흘리며 주어온 거친 산돌은 또한 그의 삶이었다. 반도에 불어대는 참혹한 현실은 작디작은 질마제까지도 비껴가지 않았다. 그것은 이 땅에 마치 영원히 뽑아내지 못할 것 같은 날카로운 서릿발이었다. 어쩌면 그의 “뻐꾹새 소리뿐”은 의지할 희망마저도 없었던 민족의 참담함을 그려냈을 터이다. -아버지는 타관으로 벌이 나가고, 어머니 할머니도 밭에 나가고, 그리고 하늘과 땅 사이에선 서글프게 울어대는 뻐꾹새 소리뿐_이었고 _벽에 흙을 때어서 먹어 보면은 , 그 속에서도 울어대는 뻐꾹새 소리뿐-이었다. 그래서 뻐꾹새 소리는 슬펐다. 영원히 오지 못할 것을 기다리는 것 같은 슬픈 노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국화를 심었다. 희망이고 소망이었다. 산돌은 자신이고 의지였다. 그래서 질마제를 떠났다. 그는 얼어붙은 반도를 떠도는 영혼들을 담아야 했다. 칠흑 같은 세상에서 그나마 우리말을 주어 담아야 했다. 때 묻지 않고 일제에 짓눌리지 않아야 했던 그 아름다운 우리 언어들을 엮어야 했다. 그것은 그의 운명이었고 산돌같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사명과 같았다. 그래서 시를 썼다. 그 일이 자그마치 70년이었다. 

미당 서정주, 그가 태어난 1915년은 민족의 불꽃이 막 꺼져가던 때였다. 그리고 14살에 산돌하나 세워놓고 질마제를 떠나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하였으나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되고 이로 인해 퇴학을 당했다. 이와 같은 반복되는 혹독한 현실 속에서 그는 시를 키웠다. 참담한 민족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무거운 고행을 덜고자 시를 키웠다. 그렇다고 그것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평론가 김우창이 “서정주의 손에서는 우리 일상생활의 무엇이든지 그대로 시가 되어 버린다.”고 했듯이 서정주는 일제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소소한 생활들마저도 시로 엮어 마음을 달래려 하였다.  그래서 시는 그의 신체였고 영혼이었고 민족의 노래였다. 이 땅에 가을이 오면 우리는 언제나 국화 옆에 있다. “국화 옆에서” 서정주를 그리워한다. 어둡고 길었던 젊은 날, 그리고 온갖 시름이 깊었던 먹구름 같았던 시절을 다 잊고 금빛 같은 국화를 보면서 서정주를 그리워한다.

1947년 그날처럼 질마제에 핀 노란 국화향이 가을 햇살에 실려 바닷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소요산 고개를 넘기가 힘겨웠던지 주진천을 타고 선운산에 올려 보내고 있었다. 태백이 알려오는 가을 풍요를 국화 향에 담아 선운산 머리에서 제를 올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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