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아주 오래전부터 남원골은 두꺼운 사랑이야기가 깔려 있었다. 깊고 애잔한 사랑은 춘향과 몽룡의 이야기가 아니다. 만복사 옆에 살았던 양생의 절절한 사랑은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만복사 옆에 살았던 노총각 양생은 매일 예쁜 처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어느날  "그대가 진정으로 고운 짝을 얻고 싶다하면 어찌 그것이 이뤄지지 못하리라 걱정하느냐?" 양생의 기도에 하늘이 대답하였다. 그것은 마치 천사 가브리엘의 음성과 같았다. 그것은 틀림없이 천황산에서 내려온 선녀의 음성이었다. 만복사 부처는 양생의 소원을 들어 아름다운 처녀를 보내주었고, 그들의 사랑과 이별의 아쉬운 이야기가 饔첵�(1435-1493)의 “만복사저포기”에 실려 있다. 사랑하고 그리고 이별하는 일이야 인간사에 흔한 일이지만 남원골 총각 양생의 사랑이야기는 평범한 일상의 인간사는 아니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의 영원한 인연은 실상 신들의 영역이었다. 만복사는 그처럼 아주 특별한 사찰이었다. 그러나 어찌 양생뿐이었을까. 여기에는 이처럼 고달프고 적적했던 수많은 중생들의 차가운 가슴을 녹여주었던 훈훈한 사랑들이 켜켜이 쌓여있었을 것이다. 그런 따뜻했던 사랑들은 이제 다 떠나가고 만복사는 스스로도 할 일을 모두 끝냈다는 듯 빈터로 오늘을 지내고 있었다.  
 

텅 빈 가슴처럼 고요하고 한적했다. 가을 하늘 빛은 뜨거웠고, 쓰리도록 짙은 푸른 하늘은 간간이 잔 구름만 흘러 보내고 있었다. 작은 그림자도 하나 남기지 못할 새털구름마저도 숨 죽이며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할 정도로 적막했다. 지나친 고독은 병이 되듯이 만복사가 그러했다. 마치 오래된 가슴앓이가 심해져 군데군데 딱지가 앉은 것처럼 보이는 낡은 돌덩이들이 여기저기서 지나간 슬픔을 보듬고 있었다. 모두다 그의 신체 조각들이다. 지금쯤이면 이 땅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녀야 할 고추잠자리 한 마리도 찾지 않은 듯 서글픈 시간이었다. 다행이도 한 젊은 남녀 한 쌍이 찾아와 그 상처를 더듬고 있었다. 무심한 햇살이 벌거벗은 몸뚱이를 태우듯 만복사지에는 뜨거운 가뭄만 짙게 배어있었다. 만복사는 오래전에 떠나가고 그 자리를 만복사지라 부르며 옛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나마 그 시절의 화려했던 모습이 작은 파편으로 남아있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었다.    
 

춘향터널을 지나며 오른 편으로 길게 늘어선 낮고 부드러운 구릉 끝으로 교룡산(交龍山)이 우뚝 서있다. 덕유산 품안에 있는 천황산에서 살던 한 쌍의 용들이 연화산으로 연꽃구경 나왔다가 잠시 요천에 목을 축이려 남쪽으로 내려와 사랑을 나누었던 신령스러운 산이다. 사랑이 깊어져 다시 돌아갈 수 없었던 두 마리의 용이 그 자리에서 산이 되어 우뚝 선 모습이다. 그리 크진 않지만 결코 작지 않으면서 선이 매끄럽고 탄탄한 몸매를 지녔다. 윤기 나는 피부가 붉게 상기된 소나무 숲이 마치 너울 치듯 펼쳐져 있고, 하늘은 깊은 바닷물처럼 조용하고 맑다. 가을하늘은 늘 그렇다. 그렇더라도 엊그제 유달리 컷던 보름달의 여운이 가을하늘을 더욱 맑게 닦아냈던 탓이리라. 남원 들녘에는 지금 한창 넉넉한 가을빛으로 넘치고 있었다. 어찌 가을빛이 뜨겁지 않을 것인가. 그 빛은 남원 들녘을 태우며 풍요를 엮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지리산 자락에 널찍하고 촉촉한 부드러움이 넘치는 들녘으로 사람 살기에 여유로운 땅이었다. 그곳 너른 들을 내려다보며 건장하게 서 있었던 옛 모습은 이제 그 흔적으로 가늠할 수밖에 없는 만복사가 교룡산 끝자락에 있다. 만복사는 그래서 교룡의 은혜를 풀어내는 사찰이었다. 교룡은 생산의 의미이고 풍요의 상징이었다. 천황산이 내려 보내는 생명이고 번영의 약속이었다. 한 쌍의 용이 요천의 물을 마시려 내려온 까닭이었다. 요천(遙天)은 글자 그대로 아득한 하늘이라는 뜻이니 그 의미는 새삼스럽지 않다. 그래서 만복사(萬福寺)였다. 온갖 복을 다 내려준다는 뜻이니 어쩌면 이 절은 석가모니 불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만복사가 여느 사찰과 달리 깊은 산중에 있지 않고 너른 들녘 곁에서 땅에 엎드려 살아온 사람들을 보듬어 온 까닭이 분명 있었을 터이다.
 

만복사지는 남원시내에 인접해 있다. 요천으로 흐르는 광치천을 건너는 다리 왕정교를 지나 있다. 만복사는 낮고 소박한 복음산을 배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작은 산의 뿌리는 기린산인데 실상 그 의미는 다르지 않다. 기린은 예부터 상서러움을 가져다주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복음산과 기린산은 모두 교룡산의 발끝으로 천황의 심중을 전달하려 내려온 모습이다. 그래서 복음이라 하였다. 산새는 거의 정삼각형인데 산머리에 박힌 하얀 바위가 마치 귀여운 토끼이빨처럼 친근하다. 키가 낮고 왜소하여 소박한 농부의 모습과 같은 소나무들이 소박하게 박혀있다. 소탈한 시골 농부의 모습과 같은 산이다. 그 복음산 남쪽 정면으로 만복사가 자리했다. 만복사는 부처를 모신 사찰이었을까? 지금 만복사지에는 옛 위용을 짐작만 할 뿐 텅 빈 채로 터만 남아있다. 그래도 그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금당 터며, 불상이 놓였을 커다란 규모의 석조대좌 등이 쓰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5층 석탑과 석조여래입상, 커다란 당간지주 등 불사와 관련된 여러 석조유물들이 남아있어 불사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사실 만복사의 위엄을 이러한 유구들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당시 5층 법당이 있었다하고 역사적으로 고려사찰의 전형을 전하는 유일한 유적이라고도 한다. 그렇더라도 두 구의 석인상은 어쩌면 양생과 그의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만복사는 여느 산중 사찰과 달리 민중들의 삶을 다듬고 꿈을 어루만지는 특별한 기도 장이었다. 그 때도 지금처럼 들녘은 황금빛이 펼쳐지고 있었을 것이다. 마치 한 쌍의 용이 산이 되었듯이 요천과 섬진강이 만나 넓은 들을 만들었고 만복사는 그 땅의 생명들을 일구었다. 모두다 덕유의 정령들인 것이다. 남원골이 예부터 사랑을 엮어내는 연유가 있었음이다.

사랑을 찾아야 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만복사에 들러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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