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복동(開福洞) 사람들의 칙칙한 하루하루는 마치 금강처럼 지루하게 흘러갔다. 초봉이의 가쁜 삶은 금강의 물결 같은 깊은 주름으로 엮여갔다. 그렇더라도 금강은 말이 없었다. 금강은 군산 개복동 너절하고 질퍽한 황토 길에 가난과 간계와 추행, 그리고 빗나간 사랑 등으로 범벅된 삶들을 바라보며 말없이 흘렀다. 때때로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그것도 가슴에 묻어둘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오직 이 땅에 있었던 그 숱한 영욕의 시간들을 먼 바다에 묻어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말없이 흘렀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사실 사람들의 몫이라 믿었다. 그것을 백릉 채만식(白菱 蔡萬植1902-1950)이 탁류로 풀駭�. 그 흐름이 그토록 곱고 여유로워 사람들은 이 물을 비단 강이라 불렀다. 물길은 깊고 물결은 잔잔했다. 물빛은 청명하여 그 안에서는 우리 민족의 아름다웠던 삶이 그대로 비치었다. 장수 수분마을 뜸봉샘에서 출발한 물길은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를 나누어 호남을 만들고 풍요로운 역사를 꾸몄다. 채만식은 그의 소설 탁류를 이렇게 시작했다.

“금강(錦江)....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중략)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또 한 번 우뚝... 높이 솟구친 갈재(蘆嶺)와 지리산(智異山)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로 설명하며 금강이 이 땅의 웅장하고 장엄한 기운을 받아 흐른다는 것을 적었다. 그렇게 흘러 군산 앞 바다로 스며든다. 바다 그것은 염원이고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 자리 금강과 바다가 만나 하나가 되는 곳 그곳이 군산이었다.

“(중략)이러케 애들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여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쏘다저 바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언덕으로 대처(大處)하다가 올라 안젓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라고 탁류에서 군산을 풀어냈다. 채만식의 군산은 금강과 만나 소망을 이루는 꿈의 터전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군산은 실로 진한 흑탕물였다. 그것은 한편 그 시절 이 땅의 모든 조선인들의 초상이었다.
 

금강이 언제 탁한 물이었던가, 뜸봉샘물은 본시 정갈하기가 그지없었다. 천리 길을 돌아 돌아 내려와 바다와 만나 잠시 머물러가던 군산앞 바다, 아침이면 갈매기가 몸을 닦고, 저녁 무렵이면 노을빛도 인사하고 가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금강이 바다와 만나 한바탕 휘둘러 노래하던 군산이었다.

그러나 채만식이 살아가야 했던 그 시절 군산은 참으로 칙칙하고 어두운 시간들이었다. 치욕과 불면의 날들을 이겨내야 했던 깜깜한 어둠이었다. 사람들은 세월을 흐르는 물과 같다하였으니 이 시절을 보낸 금강인들 어찌 맑기만 했을 까닭이 없다. 새로운 삶을 찾아 다섯 식구를 메고 서천에서 금강을 건넜던 정주사의 삶이 그랬다. “앞 뒤동이 뚝 잘려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명색이 가장이랍시고 가용의 십분지 일도 대지 못하는” 그의 가난이 서글펐다. 어디 그뿐이랴. “추렷한 부친의 몰골, 바느질로 허리가 굽은 모친, 배가 고파서 비실비실하는 동생들의 애처로운 꼴, 이런 것들이 자꾸 눈 앞을 얼씬거리면서 저절로 눈가가 따가워지는 초봉이”의 하루하루의 일상은 그래도 승재를 바라보는 사랑과 꿈이 있어 참을 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가슴속에 묻었던 사랑을 채 펴보지도 못했던 시절은 차라리 가슴을 도려내는 것이었다. 기생 행화, 윤희 등 어느 한사람 슬프지 않은 삶이 없었다. 곱사 형보의 빗나간 사랑도 참으로 슬픈 삶이었다. 이런 저런 누추하고 소소한 삶들이 개복동에서 펼쳐졌다. 조선 사람들의 동네다. 그들의 삶은 마치 금강이 흐르듯 그렇게 칙칙한 세월을 타고 흘러갔다. 

채만식은 알아보았다. 금강의 마음을 읽었다. 금강이 울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채만식은 금강에서 가까운 임피에서 태어났다. 그저 10여리 남짓하였다. 아마도 그는 어린 시절에 금강 가에서 멱 감고, 갈대와 키를 견주었을 것이다. 웅장한 강물의 흐름 속에서 꿈이 자랐고 미래를 키울 수 있었던 길잡이였을 것이다. 그가 금강에서 세월을 보았고, 잔혹한 시절을 금강에 실었던 것은 사실 숙명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그가 나이 열여섯에 들어 고향을 떠나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기까지는 군산과 금강을 깔고 지냈다. 그리고 1937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에 소설 탁류를 시작했다. 그것은 금강의 울음이고 조선 사람의 혈서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군산을 “항구라서 하룻밤 맺은 정을 떼치고 간다는 마도로스의 정담이나, 정든 사람을 태우고 멀리 떠나는 배 꽁무니에 물결만 남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갈매기로 더불어 운다는 여인네의 그런 슬퍼도 달콤한 이야기는 못된다”고 하였다. 오히려 “오늘이 아득하기는 일반이로되, 그러나 그런 사람들과도 또 달라 명일이 없는 사람들...(중략)이곳에도 많이 있다”고 했다. 오늘 하루가 너무나 긴 조선 사람들의 삶은 너나 없지만 그마저도 내일이 없는 삶들이 모여 사는 조선마을 개복동, 구복동, 둔뱀이 사람들이다. 군산 인구 7만 중에서 6만이 닥지닥지 엉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것이 어찌 그들만의 모습이었을까 마는 ....

채만식은 열여섯에 마치 긴 한숨을 토해내듯 연기를 뿜어대며 달리는 기차에 올라서울로 갔고 그리고 일본 등을 떠돌며 시대를 보았고 사람들을 읽었다. 그리고 글을 썼다. 그리고 나이 서른다섯에 마치 자서전처럼 고향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어쩌면 초봉이, 승재, 태수 그들은 그의 임피보통학교 친구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남루한 그들의 삶을 보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록 가난했지만 항상 반듯한 양복에 중절모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침묵하고 조용했으며, 청빈하고 정갈한 생활을 지켰다. 이는 분명 “손바닥만한 빈틈도 남기지 않고 콩나물 길 듯 다닥다닥 주어박혀”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다. 어찌 개복동만이 아니다. 그의 시절 반도의 삶이 그랬다. 그래서 왜인들의 동네였던 “근대식 건물로든지, 사회시설이나 위생시설로든지, 제법 문화도시의 모습을 차리고 있는 본정통이나, 전주통”을 바라보는 울분을 삭히는데 평생을 걸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마치 뜬봉샘물을 닮은 우물만이 홀로 생가 터를 지키고 있다. 그나마 그의 문학관이 언제나 금강과 함께하고 있어 다소 위안이 되었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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