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사. 백제 신궁이었다?
 

여름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여름이 깊었다는 것은 가을이 가까웠다는 말이기도 하다. 고추잠자리가 적막하기만한 제석사지 허공을 맴돌고 있다. 마치 숨 가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맞춰 춤을 추기라도 하는 듯 그렇게 여유롭다. 그 모습을 길 건너 담장위에 걸터앉은 능소화가 남루한 얼굴을 하고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울고 또 울어 눈물도 말라버린 듯 초췌하기 그지없는 표정이다. 낮게 드리워진 장마구름이 그의 가슴을 더욱 짓누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능소화의 슬픔을 아는 듯 어린 강아지가 자지러지게 짖어대고 있었다. 어쩌면 뜬금없이 찾아든 낯선 이방인의 모습에 서러움이 더 커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더라도 능소화의 슬픔은 참으로 오래된 것이었다.
 

능소화는 태양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둥글게 생긴 그 모습이 해를 닮은 듯하여 그렇게 불리기도 하지만 실상은 생김새보다 빛깔에서 알아본다. 꽃 중심으로 부터 황금색 노란빛이 밖으로 퍼져 나오면서 짙은 붉은 빛깔로 확산된다. 그리고 그 모습이 마치 새벽 햇살이 퍼지듯 표현되어 영락없이 닮았다. 그래서 능소화는 햇볕이 짙어지는 한 여름에 핀다. 그리고 능소화가 피면 어김없이 태풍이 찾아들어 능소화의 가슴을 후벼 판다. 능소화는 온 몸으로 이를 받아내며 오래된 한을 삭이며 당당하게 몸을 던진다. 그 모습에서 분명 우리가 알 수없는 하늘의 어떤 비밀이 숨겨있음을 읽어야 한다. 이렇듯 세상에는 저마다 남모르는 비밀이 있다. 그래서 철모르는 고추잠자리라 탓할 일만은 아니다. 제석사도 틀림없이 알 수없는 큰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제석사는 사찰이었을까?
 

김부식은 왜 삼국의 이야기를 하면서 제석사를 감쪽같이 숨겼을까. 하기야 그는 백제 최고의 성왕이었던 무왕에 대해서도 붓을 대지 않았다. 1500여 년 전에 대체 제석사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석사는 무왕이 세웠던 왕실사찰이라 알려져 있다. 삼국에서 제일 웅장했던 미륵사 다음으로 크고, 또한 가장 화려했던 사찰이라 하였다. 그것도 무왕이 익산에 왕궁을 세우면서 조성하였던 가장 중요한 사찰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이 없었던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제석사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일까. 그의 역사만큼이나 지금 제석사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야말로 적막하고 고요했다. 뜨겁고 무더운 날씨가 더욱 깊은 정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고추잠자리의 안내를 받아 토루를 만들어 높게 올려진 탑지에 올랐다. 7층탑이 있었다는 그 자리에는 장방공이 뚫려있는 심초석만 덩그러이 남아있고 4방 모서리에는 탑신을 받쳤던 초석이 놓여 있어 당시 탑의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용화산을 축으로 하여 일직선으로 탑과 금당이 조성되었다. 탑지에 올라 보니 멀리 용화산이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 아득하게만 보였다. 어쩌면 제석사의 비밀은 용화산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이렇듯 몸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석사는 용화산 자락이 남쪽으로 흘러내려와 이룬 왕궁평야 동쪽에 있다. 그러니까 왕궁리 유적에서 동쪽으로 약 1km 남짓인데 이곳은 지금 궁평마을이라 부른다. 궁평은 왕궁 옆 제법 너른 개활지로 용화산이 내려 보내는 생명수를 받아 풍족함이 넘치는 들녘이다. 그리고 그 동편으로 끝없이 파도처럼 이어지는 구릉지대가 이어지는데, 솔숲이 무성하고 서기가 맺혀있는 자락 한 곳에 제석사가 조성되었다. 무왕의 왕실사찰로 왕궁에서 곧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어쩌면 불교사찰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김부식이 지우고 싶었던 역사적 사실은 아마도 제석사는 사찰이 아니었다는데 있었던 것 같다?

제석사(帝釋寺)는 어쩌면 그 이름에 비밀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옛 민화에 제석풀이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을 다 설명할 자리는 없지만, 제석을 우리 선조들은 옥황상제라 불렀다. 하늘의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을 말한다. 환인제석(桓因帝釋)이라는 말이 일연이 쓴 고조선기에 등장하고, 그러니까 그 말은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사용해 온 것이며, 그리스의 태양신 제우스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제석신앙은 불교 이전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온 천문사상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떻든 우리 민속에서 옥황상제를 제석이라 부르고 널리 숭배되어왔다는 것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옥황 즉 제석이 황소나 용으로 상징화되었다는 것 또한 널리 알려진 것이다. 용화산과 제석사 그리고 무왕의 비밀의 고리가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김부식이 무왕의 역사를 지우려했던 배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무왕은 용의 아들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그의 어머니는 서울 남쪽에 살다 연못속의 용과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짧게 남겼다. 무왕을 어릴 적 그렇게 불렀다. 그곳이 용화산 자락이다. 무왕은 마를 캐서 팔아 홀어머니를 공양하고 후일 왕위에 오른 설화적 인물이다. 그가 42년 동안 제위에 올라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며 용화산 자락에 왕궁을 축조한 배경을 짐작할 만하다. 그리고 그는 필연코 왕궁 옆에 제석사를 지어야 했다. 그것은 부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석을 위해서였다. 즉 하늘에 제사를 올려야 했던 것이다.

제석사는 어느 날 뇌우를 맞아 소실되었다 한다. 왜 뜬금없이 제석사만 번개에 소실되었다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것이지만, 소실 이후 그 잔해들을 고스란히 수습하여 한곳에 모아 묻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라 할 만하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참으로 기이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이상한 화제를 만나 불타게 된 사실을 번개로 둔갑시킨 것은 아닐까.
 

옥황상제를 모시는 신당이 불가의 사찰형식을 따르고 있음은 불교가 전래한 이래 오랜 전통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무속신당에는 보살상을 모시거나 사찰의 모습을 담고 있음으로 알 수 있다. 어쩌면 무왕도 그 절충형식을 따랐을지 모른다. 무왕은 용화산의 천제를 위해 제석사를 세웠다. 그리고 허망하게도 제석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 어쩌면 용화산과 무왕 그리고 제석사의 관계를 김부식은 영원히 숨길 수 있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그는 후일 고고학이라는 이상한 학문이 나타날 것을 알았을 리 만무하다. 능소화의 설움이 이해될만 하였다. 오늘도 등이 휜 소나무 몇 그루가 마치 조의선인처럼 떵 빈 신궁을 쓸쓸하게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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