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 속처럼 깊은 산중에도 망초는 가득했다. 어느 날 우연히 태평양을 건너 낯선 땅에 피어 이름을 망초(亡草)라 불렸을 뿐, 그것은 때를 잘못 잡아 그리되었을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망초는 이제 이처럼 깊고 깊은 산중 한 가운데서도 마치 하얀 진주가 뿌려진 듯 흐드러진 모습에 잔잔한 감상이 서리게 된다. 그 자태가 하도 화사하여 노령(盧嶺)의 심중처럼  맑고 깊다.
노령의 정수리였다. 그곳은 정말 우렁 속처럼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웠다. 첩첩산중이란 말은 여기를 일컬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구름의 고향이고 바람의 거처였다. 소백산 추풍령에서 가을바람을 이끌고 달려 나와 우뚝 선채 영겁의 세월을 지켜온 이유가 분명했다. 그 먼 시간을 마치 처녀 가슴 속처럼 그렇게 소박하고 정갈하게 지켜온 모습이다. 6월의 망초꽃은 그 모습으로 피어난 듯하다. 그러나 망초꽃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영롱하지만 그 꽃의 서러움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의 이름은 참으로 억울한 것이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또한 저마다 사연들이 깊었다. 그 사연들의 실타래를 푸는 일은 노령이 해야 했다. 그 일이 순창 복흥에서 이루어졌다. 노령이 소백산에서 가을바람을 끌어와 우렁 속처럼 깊고 은밀한 이곳에 담아두었던 연유도 분명했다. 가을바람은 결실과 수확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노령의 복심으로 태어난 곳, 이곳을 복흥(福興)이라 부르는 연유다. 넉넉하고 여유로워 삶이 즐거운 곳이라는 것이다. 이곳 복흥에서 가인 김병로가 태어난 이유는 분명했다.  
 

복흥 땅 한 가운데에는 요상하게 생긴 바위덩이가 불쑥 솟아있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그 차림새가 특별하여 이를 메기바위라 불렀다. 사실 바위라 하나 그 자태는 엄정한 산세를 하고 있어 위엄이 있다. 더욱이 메기바위 머리에는 꼿꼿하고 건장한 소나무들이 울창하여 한층 고상하고 기품이 넉넉하다. 그 한 가운데 작은 정자 하나가 소담하게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신선처럼 정갈하다. 이곳이 낙덕정(樂德亭)이다. 낙덕정을 머리에 이고 있는 메기바위는 노령의 사리처럼 분명하고 단단하다. 노령산맥이 추풍령에서 뛰쳐나와 서해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데, 그 노령의 머리 한가운데 가마처럼 비밀스러운 곳이 복흥이다. 내장산과 백암산이 만나 낳은 곳이다. 내장산 신선봉에서 정액처럼 흐르는 맑은 정기는 복흥 들녘을 적시고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그 길목에서 메기바위는 마치 입술을 적시듯 엎드려 있다. 내장산 신선봉의 정기를 받아먹고 있는 것이다. 무척 가물었던 그날도 복흥천은 촉촉하기만 하였다. 메기바위는 늦은 햇살에 지루한 듯 한가하게 엎드려 있는데 그 아래로 잔잔한 물빛이 햇살처럼 투명하였다. 마치 커다란 돌 수반 위에 야트막하게 물이 담겨있는 모습이다. 특이하게도 이곳은 거대한 암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신선봉의 큰 의지가 이처럼 사리처럼 뭉쳐있는 것이다. 이 메기바위에 울창한 소나무 숲이 청청하고 또한 낙덕정이 서 있는 까닭이다. 사실 낙덕은 신선봉의 또 다른 현신이며 소망이 서려있는 것이고 또한 세상에 내린 새로운 메시지였다.
 어느 날 학 한 마리가 메기바위에 올라 정자를 올리고 낙덕이라 하였다. 그가 조선 성리학을 이루었던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년 ~ 1560년)였다. 그는 실제로 정조임금이 일컬어 조선에서 “도학과 절의, 문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 지칭할 만큼 큰 인물이었다. 그는 아마도 낙덕정에서 학덕을 다듬다 세상을 떠나 내장산 신선봉에 올랐을 것이다. 그에 대한 일화가 전하는 내용을 보면 분명하다. 그의 이웃에 살았던 오세억이라는 사람은 죽었다가 하루 만에 깨어났는데, 그는 “죽어서 자미궁(紫微宮)에 갔더니 자미궁의 신선이 되었던 김인후가 자네는 아직 올 때가 아니라 하며 돌려보냈다.”고 하였다 한다. 어쩌면 신선봉아래 복흥이 자미궁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곳 메기바위를 찾아 복흥에 들려면 높고 험난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굽이굽이 아흔 아홉 고개를 돌고 돌아 넘어야 한다. 사방에서 이처럼 오르기 어려운 깊은 우렁 속 같은 신비한 곳에 자미궁을 만들었고, 그 한 가운데 낙덕정이 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김인후의 학덕을 받았던 인물이 김병로였다. 가인 김병로(佳人 金炳魯 1887 ~ 1964)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인이다. 무엇보다 우리 법체계를 바로 세웠던 인물로 존경을 받는다.

사람들은 왜 법(法)을 물(水)이 흘러가는(去) 것이라 했을까? 아마도 법은 물처럼 사람들의 막힌 곳을 뚫는 것이라 생각했을 법하다. 어쩌면 사람들의 일이란 항상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믿었을지 모른다. 김병로가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웠고, 민족의 삶은 참으로 팍팍했던 시절이었다. 사는 일이 그토록 고단했던 사람들의 가슴에는 너나없이 갈등과 증오만 가득했을 터였다. 그야말로 서로간의 소통이 꽉 막힌 삶이었다. 이를 뚫어야 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6월의 망초가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에 억울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 사연들을 들어야 했다. 그것은 김병로에게 주어진 천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는 낙덕정 아래에서 부름을 받았다. 그곳이 복흥 메기바위 아래 하리였다. 신선봉에서 출발한 물이 구름처럼 소소히 흘러 낙덕정에서 잠시 머물다 한가하게 돌아가는 곳이 하리다. 김병로가 메기바위 어깨 축 한 자락에서 태어난 것은 그런 연유였다. 김인후가 신선봉에 오른 이후 15대가 흐른 후 김병로는 세상의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법은 물처럼 부드러워야 하고 또한 물처럼 가볍게 흘러가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것은 이미 김인후가 메기바위 위에 세운 낙덕의 덕목이기도 하였다. 그는 법이 덕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메기바위에서 얻었다. 법은 사람 일을 가르는 날카로운 칼이 아니라 서로를 감싸고 포용해야하는 아름다운 마음이어야 했다. 김병로는 몸소 법의 실제를 실천하고 실행하여 우리 현대사를 이루어냈다. 그의 삶처럼 소박한 모습의 옛터는 솔바람이 잠시 들렀다 돌아갈 뿐 고요하고 적적하기 그지없었다. 낙덕에 머물던 바람이 가끔씩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그것도 김병로가 어린 시절 낙덕 물가를 찾아 함께 해준 인연 때문이었다. 그날도 망초는 작은 별처럼 맑은 얼굴을 하고 김병로를 찾고 있는 듯 잔바람에 몸을 맡기고 담장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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