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두 권의 시집을 펴낸 뒤 줄곧 침묵을 지켜 온 정읍 출신 시인 배용제가 11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펴냈다. ‘다정’이다.

등단한 해 처음 선보인 ‘삼류 극장에서의 한 때’에서는 죽음의 현대성을 통해 자본의 신화가 건설한 세계의 뒷면을 미리 보여줬고, 7년 후 출간한 ‘이 달콤한 감각’에서는 냉혹한 관찰자의 시선에 포착된 낯선 세계를 펼쳐 보이며 세계의 빈약함을 읽어냈다.

이렇듯 죽음에 가 닿아 있던 작가가 10여년 만에 꺼내든 세 번째 작품집의 제목은 뜻밖에도 ‘다정’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대로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삶의 자양분으로 인식하고 있어서다.

책에서는 꽃이 피고 구름이 지나가며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일련의 자연스러운 과정들이 실은 자연물들이 찢기고 울부짖는 심상치 않은 세계라는 가정 하에 고요와 성찰을 매개로 주어지는 식물성의 세계, 고통과 병에 대한 성찰이 저항으로 탈바꿈되는 그들의 사생활, 고통의 희열을 매개로 한 마리 짐승으로 돌변해버리는 과정을 포착한다.

가령 주요소재인 꽃은 아름다움을 상징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생과 사 가운데 서 있는 중간적 존재다. 어둠을 소화하고 울음을 터뜨려야 제 빛을 발하지만 결국 제 몫을 다하고 나면 시들어 죽는 등 최선을 다해 무덤으로 향하는 셈이다.

‘나는 우발적으로 살아 있고, 지속적으로 죽어간다(계절들에게 쓴다)’와 ‘내 것이 아닌 나를 내가 사용하는 것 같은 죄스러움(떨림)’에서 같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문학과지성사. 153쪽. 8,000원./이수화기자·waterflowe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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