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3년12월 부여의 백제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 절터에서 금동대향로가 다른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출토됐다. 후일 국보 287호로 지정된 이 금동대향로는 백제 후기 것으로 높이 64cm, 무게 11.8kg으로 크게 몸체와 뚜껑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대형 금동향로에는 23개의 산과 5인의 악사, 무인상이 새겨져 있었고 39마리의 동물도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묘사돼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 금동향로에 대해 사비 백제시대 최고의 금속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이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런데 이 출토지역이 백제나성 안이라는 게 흥미롭다. 나성은 원래 안팎 2중 구조로 된 성곽을 뜻한다. 중국 주나라 때 왕이 사는 도성을 2중 성벽으로 감싼 것이 시초다. 우선 안쪽 성곽은 내성이라고 부르는 데 그 안에 궁궐과 관청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외곽, 나곽, 곽성 등으로 불리는 바깥 성벽은 시장과 민가, 농경지 등 도시를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부여의 백제나성도 크게 이 구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성의 둘레는 모두 6.6km에 달했다. 2중으로 된 안쪽 작은 성안에는 왕궁과 관청이 그리고 바깥쪽 긴 성안에는 민가와 절, 상가, 방어시설 들이 계획적으로 배치됐다. 남쪽과 서쪽으로 금강이 굽이치고 나성 옆에 청산성과 청마산성 등이 함께 배치돼 수도를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로서 구실을 다했다.
  백제나성을 발굴 중인 백제고도 문화재단은 얼마 전 이곳에서 무령왕릉과 똑같은 연화무늬 전돌과 철제 모루 등 유물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부여 나성이 기원후 6세기 초에 축조됐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단서다. 이렇게 되면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기 전에 이미 나성이 존재 했고 또 철저한 도시계획으로 잘 짜인 도시가 건설됐다고 보아 무리가 없다. 또 철제 모루는 이 성곽에 군사시설이 설치돼 있었음을 말해준다. 2011년부터 7차에 걸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인 백제 나성의 진면목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부여와 공주, 익산 등 백제유적들은 이미 국제 기념물유적협의회에서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를 권고한 상태다. 거기에 이런 귀중한 유물들이 나와 백제문화의 진수를 확인시켜 주고 있음은 경사라고 할 수 있다. 백제를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라에 멸망당할 때 너무 철저히 파괴되는 바람에 과거 흔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이제 곳곳서 백제 유물들이 출토돼 과거 영화를 입증하고 있다. 이는 관광은 물론 지역 정체성이나 역사의식 제고 등 여러 면에서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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