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11월17일 저녁 8시. 경복궁에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가 이끄는 일본 군대가 진입했다. 궁궐 한 회의실에는 이완용을 비롯한 조선 대신 8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 회의실을 포위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윽고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 제국의 외교를 일본이 대신해 주고 이를 위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 한다”는 내용을 주로 하는 조약체결을 강요했다. 이른바 을사조약 혹은 을사늑약이다. 대신 8명 가운데 이완용 등 5명이 이에 찬성했고 이로써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 식민지가 됐다.
  이 다섯 명의 매국노들은 이후 을사오적이라는 낙인이 찍혀 사실상 우리 국민들의 공적이 됐다. 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황제가 끝내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초대 통감이 돼 한국 내정을 농단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20일 황성신문 주필인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하 논설에서 “오호라, 개 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에 겁을 먹어,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었으니, 사천년 강토와 오백년 종사를 남에게 바치고 이천만 국민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으니…”라고 통탄했다. 그는 이어 “아, 원통하고 분하다. 우리 이천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며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뻔뻔한 일제는 오히려 을사조약을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불렀다. 즉 자신들이 힘이 약한 조선을 이 조약을 통해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이미 열강들로부터 한국 병탄을 인정받은 일제는 한반도 식민화에 속도를 냈고 1910년 완전히 강제병합을 마무리 했다. 당시 이천만 국민들이 겪은 수모는 오늘에도 씻을 수 없는 민족의 치욕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주일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서 을사보호조약을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 암살, 한일합방 등 일본의 역사왜곡 표현들을 그대로 사용해 물의를 빚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지난 2007년부터 일제가 말하는 식 그대로 한일관계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부 교과서 편수자료 등 올바른 표현을 무시한 것이다.
  어이가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의 노골적이고 파렴치한 역사 왜곡으로 국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이 때, 우리 정부마저 이런 식으로 대응한다니 과연 어쩌자는 것인지 묻고 싶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광복 70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일제 잔재가 우리 일상생활에 깊이 침투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는 현실은 우리 모두를 참담하고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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