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미 - 군산 동국사 소조석가여래삼존상

군산은 북으로는 금강, 남으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주변에는 넓은 평야가 발달한 곡창지대이자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도시다. 이같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 개항되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개항과 함께 일본인들을 위한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가 설정되기도 했다.
당시 대부분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침략에 종교를 앞세웠던 것처럼 일본도 조선 개항과 동시에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각종 불교종파들이 한국에 진출해 앞다퉈 사찰을 개척했다.
군산시 금광동 월명산 자락에 자리잡은 ‘동국사’도 그런 연유로 개창된 절이다. 동국사는 군산에 오래 거주한 군산시민들이나 일부 불교 신도들만이 알 정도로 자그마한 절이지만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에게는 ‘꼭 가봐야 할 곳’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고 있을만큼 그들에게는 소중한 절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이 절에 소장된 ‘소조석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주목을 받고 있다.

1909년 일본인 승려에 의해 창건
일본불교는 1877년 부산의 개항과 함께 식민지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일본 정부의 강압에 의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불교가 조선 왕조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에 따라 산속에 자리를 잡고 참선수도를 하는데 비해 일본의 불교는 도심속에 자리를 잡고 일반 서민들과 밀접한 생활불교를 지향했다.
외국인 전용 주거지역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일본 불교는 가장 먼저 정토진종 대곡파(淨土眞宗 大谷派)가 포교를 개시한데 이어 일연종(一蓮宗)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1911년 6월 3일자로 사찰령을 발령, 이를 계기로 전국에 별원, 출장소, 포교소 등이 잇달아 설립된다.
동국사는 한일합방이 이뤄지기 전 해인 1909년 일본 조동종(曹洞宗) 승려 우치다 붓관(內田佛觀)에 의해 창건됐다. 창건 당시 절의 명칭은 ‘금강선사(錦江禪寺)’였다.
금강사가 창건되기 전에 이미 군산에는 본원사, 군산사, 안국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치다 붓관은 1909년 군산 일조통(一條通)에 있던 집을 빌려 포교소를 개설한 뒤, 1913년 7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본당(本堂)과 고리(庫裡)를 신축한 것으로 전해진다.
군산시지에 따르면 동국사가 창건될 당시 군산시 인구 4,900명 가운데 일본인이 2,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일본인들이 군산에 들였던 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 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에 귀속됐다.
1955년 불교 전북교당으로 증여됐고, 남곡스님이 ‘해동대한민국’이란 뜻의 ‘동국사(東國寺)’로 개명했다. 1970년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에 등록 증여됐다.

‘삼존상 및 복장유물’ 보물로 지정
군산 동국사는 국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다.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사찰이 500개에 달할 정도로 많았으나 대부분 해방과 함께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있는 곳도 원형이 심각하게 훼손돼 창건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오직 유일하게 군산 동국사만은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동국사의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 정방형 단층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에도시대(江戶時代) 건축양식으로, 외관은 화려하지 않으며 소박한 느낌을 준다. 재질은 일본 삼나무(일명 쓰기목)로, 전량을 일본에서 들여왔다. 지붕물매는 75도의 급경사를 이루고, 건물 외벽에 미서기문이 많다. 용마루는 일직선으로 전통한옥과는 대조를 이룬다. 대웅전을 들어가려면 요사채와 연결된 복도를 통해야 한다. 대웅전은 등록문화재 제64호로 지정돼 있다.
마당 한켠에 자리한 범종각에는 종각 지붕에 높다랗게 범종이 매달려 있다. 한국 사찰의 범종에 비해 크기가 작으며 범종각 앞에는 석불상이 늘어서 있다.
범종의 겉면에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어 해방 이후 화를 면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그래서인지 범종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식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보니 동국사에는 일본인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때는 일본인들이 한국사람보다 더 많이 찾아오기도 했으며, 일본 NHK 등에서는 40분짜리 생방송을 현지와 연결해 진행하기도 했다.
봄날 벚꽃이 핀 동국사는 장관이다. 영화 ‘타짜’, ‘접속’ 등이 이곳에서 일부 장면이 촬영되기도 했다.

1650년 조성된 조선 중기 소조불
대웅전에 모셔진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원래 금산사 대장전에 봉안되어 있던 것을 당시 전북종무원장으로 재직하던 남곡스님이 1950년대 후반 동국사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석가모니불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 가섭존자, 우측에 아난존자 입상이 협시해 있는 모양이다.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 따르면 이 삼존상은 1650년 효종 1년에 조성돼 금산사에 봉안됐다. 불상의 조성에는 벽암각성과 호연태호 등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양대 문파의 최고승이 참여했으며, 조각에는 당대 최고의 조각승 응매 등이 참여했던 것으로 전한다.
벽암각성은 어려서는 임진왜란 해전에 참여했고, 병자호란 때에는 승려들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해 적들을 섬멸한 승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전주 송광사 나한전을 비롯해 화엄사 대웅전과 보제루, 금산사, 고창 문수사, 쌍계사 등 주로 호남지역 사찰의 대작불사를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석가모니불은 조선중기의 불상으로 육계가 뚜렷하고 통견법의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나무로 틀을 짜고 진흙을 발라 조성한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소조불상이다.
높이 150cm, 무릎넓이 105cm에 이르며, 약간 고개를 숙이고 정면을 향해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신체에 비해 약간은 큰 듯한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우며, 이마는 넓고 평평하다. 신체는 어깨가 둥글면서도 살이 찐 듯한 모습이며, 무릎 폭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가섭존자상은 높이 160cm로, 대머리와 이마의 주름, 길게 늘어진 백발의 눈썹, 턱수염, 늘어진 볼살, 입을 벌리고 웃는 모습 등 노년의 나한상을 잘 묘사하고 있다.
반면 우측의 아난존자는 젊은 사미승의 모습으로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정면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넓적한 얼굴에 가늘고 긴 눈, 오똑한 코, 꾹 다문 작은 입 등이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을 보여준다.
석가여래삼존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은 전적류, 복장품(은제 후령통), 직물류, 곡식․약초류 등 총 373점에 이른다. 전적류는 한지 다발과, 묵서 발원문, 묵서 시주질, 목판본 ‘묘법연화경’, 목판본 ‘선문염송’, 목판본 ‘보협인경’(대불정수능엄신주) 등이 발견됐다. 이들 유물은 1650년 조성 당시에 납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 불상에서 나온 전적물이나 복장물의 기록에서 볼 때 이 삼존상은 조선시대 불상양식이 형식적으로 흐르기 전 단계의 소조불상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특히 세 불상에서 나온 복장물은 후령통의 제작기법, 내용물, 재질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시인 고은이 출가한 동국사
군산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최근 몇 년동안 노벨문학상 후보로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고은 시인이다.
군산 출신인 고은 시인이 불가에 몸을 담았던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만 그가 처음 출가한 곳이 동국사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동국사를 자주 찾았던 고은은 6.25전쟁 직후 극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후유증으로 한쪽 귀를 심하게 다쳤다고 한다. 방황을 거듭하던 그는 이곳에 머물던 객승 혜초스님을 만나 참선을 배우며 불교에 입문했다. 군산북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1952년 당시 19세의 나이에 혜초스님에게 ‘중장’이란 법명을 받아 정식으로 출가했다.
시인 고은을 출가시킨 혜초스님은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독특한 이력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며, 고은과 더불어 전국을 떠돌기도 했다. 그는 고은에게 ‘너는 나의 제자이지만 스승’이라며 서로 절을 주고받는 등 기이한 행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은의 인물됨을 알아본 혜초스님은 결국 고은을 통영 미래사 주지였던 효봉스님에게 추천했고, 고은은 효봉스님을 찾아가 ‘일초’라는 법명을 새로 받았던 것으로 전한다. 한때 해인사 주지서리 소임을 맡기도 했던 고은은 이후 불교신문 주필, 전등사 주지 등을 지낸 뒤 1962년 환속했다.
/소문관기자․mk7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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