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과 아트폴리스(이철량)
예향과 아트폴리스는 어떻게 다를까. 전주는 수십 년 전부터 예향이라 불리었다. 적어도 정치적으로 지도자 위치에 있었던 인물치고 그들의 인사말 속에서 의례적으로 전주는 예향이라고 외쳐보지 않았던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전주에 갑자기 아트폴리스라는 구호가 울리고 있다. 과연 예향과 아트폴리스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예향은 어쩐지 좀 촌스럽고 구식 같으며, 아트폴리스는 현대적인 이미지에 세련미가 넘치는가. 아마도 그런 것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갑작이 전주를 아트폴리스로 건설한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향이란 말을 영어로 옮기면 아트폴리스 아닌가. 예전엔 전주는 그야말로 아트폴리스였다. 도시는 정갈하였고, 곳곳에서는 예술적 향기가 묻어났다. 그림이 걸리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판소리도 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주가 많이 바뀌었다. 그래서 일까. 지난해 전주시는 전주를 아트폴리스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아트폴리스” 참으로 듣기 좋은 말이다. 기왕에 예향을 아트폴리스로 고쳐 부르겠다면 허망한 구호에 그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거리에 좀 더 디자인된 건물이 들어서고, 한옥마을이 곱게 가꾸어지면 예술적인 도시가 될 것인가.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과연 누구를 위해 만들어지는가. 관광객들을 위한 것인가. 물론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런데 정말 아쉬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자주 만나는 가까운 후배의 예기다. 그는 중화산동서 터널을 지나 구시가 쪽으로 매일 출근을 한다. 요즘처럼 아침 햇살이 가볍고 맑은 때에는 출근길이 참 즐겁다는 것이다. 더구나 화산에서 날아오는 아카시아 향기에다 지나는 길 담장너머에서 피어난 장미가 웃어주는 계절에는 누군들 아침 출근길이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즐겁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짜증이나 이 도시에 사는 것이 불쾌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길거리 쓰레기 때문이다. 도로 주변에 널려있는 쓰레기는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기에도 몇 달은 되어 보이는 묵은 쓰레기였단다. 그래서 그는 처음 동사무소에 전화했다. 돌아온 대답은 청소는 구청에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구청에 전화?를 했더니 알았노라고 했단다. 그러나 그 쓰레기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치워지지 않았단다. 며칠 후 다시 확인전화하면서 전화 받는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려했다. 그랬더니 잠시 청소가 이루어지는 듯 하다가 지금도 쓰레기는 여전히 나뒹굴어 아침 출근길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길거리 쓰레기는 그렇다 치고, 자기 가게 앞 쓰레기조차도 치우지 않는데서는 정말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이 후배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시내 중요도로 몇 군데를 제외하면 시내 전체가 이와 다르지 않다. 하기야 시내 가게 앞에도 이런 상황은 쉽게 눈에 띤다. 중심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걷기에도 불편할 정도로 보도블록은 뒤틀려있고, 차도도 포장이 제대로 남아있는 곳이 드물다. 물론 시내 간판 대부분은 전혀 디자인을 염두에 둔 적이 없는 것들이다. 문화도시 전주의 자화상이 이렇다. 그러나 이런 눈에 보이는 모습은 정말 겉모습에 불과하다. 이렇게 도시를 방치한 이유의 저간에는 아랫사람이 써준 원고 속의 “전주는 예향”을 외쳐댔던 지도자들의 자화상이기도 한 것이다.

작금에 전주시가 아트폴리스를 주창하고 나서는 데서 어느새 예향의 가치를 상실해 버린 전주의 고뇌가 담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토록 풍부했던 예술적 소양과 자산을 외면해 버린 지도자들의 잘못이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트폴리스가 되려면 모양만 디자인하면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거기엔 격조와 품격이 깃들어야 한다. 거리를 깨끗이 하고, 편리하게 정비하며,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기본이지만, 그 속엔 도시의 품격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를 아끼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더욱이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 그들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전주시가 과거 전주가 예향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를 한번 되새겨 보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