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양한 햇살 아래에서

최승범 고하문예관장

엊그제로 입춘이 지난 주말이다. 모처럼 당양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 앉았다. 한한한 마음이다. 표지 장정도 산뜻한 책 한 권을 펼쳐 들었다. 책이름은 《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인생연가》다. 긴 제목이다. 먼저 ‘인생연가’에서 젊은 시절 애송한 바 있는 롱펠로우의 ‘인생송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생 송가가 아니다. 밤나무 검사가 딸에게 쓴 인생 연가라는 구체성을 띤 점에 정겨움과 호기심부터 돋았다.
 나는 책이름을 대하면 버릇처럼 지·정·의를 생각하게 된다. 이 중 어느 부류일까를 챙겨보는 것이다. 이 책은 주정적인 빛깔이 짙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당양한 햇살 아래에서 읽을 책으로는 더욱 안성맞춤이 아닐까.
 한편 상촌 신흠(申欽)의 말이 어려들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루에 착한 말 한 가지를 듣거나, 착한 행동 한 가지라도 보았다면, 그 날이야말로 헛되게 살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가 곧 그것이다. 정작,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상촌의 이 말에 실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치 이 책의 행간마다에서 진·선·미에 젖는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글에서 풍겨오는 ‘밤나무 검사’의 모습과 기품은 오늘날 우리의 세상살이·사람살이에서 가까이 바라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은 ‘학처럼 고고한 모습’이요, ‘대쪽같이 꼿꼿한 선비의 가상’이 있었다.
 책이름만으로 지·정·의에서 ‘정’의 빛깔이 짙겠다고 한 것은 나의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 책에 담겨 있는 편 편의 글에는 깊은 지성·높은 이성도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정·의를 아우른 한 인격체와 어제·오늘뿐이 아닌 먼 앞날까지 내어다 본 투철한 정신형상 앞에서 나는 거듭 두 눈을 비비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린위탕은 《생활의 발견》에서 독서의 즐거움은 인생을 읽는 데에 있다고 했다. 나는 고전이나 양서를 읽으면서 반신(反身)하기를 좋아한다. ‘반신’은 그 책의 내용을 나에게 되돌려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함을 말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단한 반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울안의 인연들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해 왔던가. 내 동료와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였던가. 내 길을 걸어오면서 나라와 겨레에 기여한 무엇이 있는가. 둘레의 자연 사물을 하찮게 여긴 바는 없었던가.
 요는 ‘밤나무 검사’의 이 책을 읽으며 새삼 나의 세상살이·사람살이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퍼뜩 새정신이 든 것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자허원군성유심문(紫虛元君誠諭心文)’을 이 책으로 하여 알게 되었다. ‘밤나무 검사’는 대학입시를 앞둔 자제의 공부방에 한문으로 된 이 글을 판서해 놓고 암송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 자신도 이 글로 하여 ‘평생동안 어둠을 환히 밝히는 인생의 밝은 불빛으로 삼아왔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이 되길 소망한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나 또한 이 한 편 글로 세상살이 사람살이의 ‘불빛’을 삼고 싶다. 210 한자로 된 원문부터 암송하리라. 마음에 새기리라. 깨우쳐 주는 말씀에 어려운 것은 없다. 다만 오롯이 실행하기가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막상 일에 부닥치면 순간순간 마음을 잃기 쉬운 것이 범속한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 ‘성유심문’으로 반신하게 된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새봄의 햇살 아래 나의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책장을 덮는 마음이 후련하다.
 정작 이 책의 저자 소개를 잊을 뻔했다. 나는 ‘밤나무 검사’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이 책의 표지 2면에 소개된 약력의 일부를 옮겨 본다.
 1969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를 시작으로 전주지방 차장검사를 지낸 바 있고, 대검 차장검사를 끝으로 1995년 검찰을 떠나, 그 후 법제처장을 지냈다. 밤나무 검사로 알려진 것은 1965년 군법무관으로 월남전에 복무할 때 비행기 길에 고국 산야의 헐벗음을 보고 느낀 바 있어 1973년부터 논산 양촌면에 밤나무를 심기 시작한 데에서 온 별호라고 했다. 현재는 양촌영농조합법인을 만들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여운이 나의 앞날 길이 이어지고 많은 독서자에게도 널리 펑퍼지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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