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L과 응고의 원칙

박영학(원광대학 교수)

최근 북한이 6·15 남북 기본합의서와 그 부속 문건을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그 가운데는 남북이 어렵게 도출한 NLL의 평화적 이용을 무력화하는 의도가 깊게 깔려 있다.
 남북이 긴장 국면에 들면 북한은 중병설이 떠도는 김정일의 이후 권력향배와 맞물려 내부 결속을 다지는 호기로 삼을 수 있다. 이(李)정부는 남북의 긴장을 통해 보수 세력의 대결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정권 유지 차원에서 보면 서로 나쁠 것이 없다는 계산이 나올 수 있다. 안보가 정권유지에 기여한 박 정권 때와 유사한 흐름을 예상할 수 있다.
 NLL은 멀리 보면 1950년 6·25의 산물이다. 북한의 남침 상황을 살핀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전시작전 지휘권 이양을 요구한다. 이승만은 심각한 주권 위임 문제인데도 국회는 물론 내각, 심지어 당시 외무부와 논의 한 마디 없이 단독으로 ‘전작통’ 이양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맥아더가 지휘하는 유엔군은 9·28 서울 수복 후 한국군과 함께 북진을 계속하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남하를 단행한다. 51년 이른바 1·4 후퇴이다.
 이후 전쟁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유엔군은 서해상의 북한 해군 남침을 저지하는 군사봉쇄선을 긋는다. 북한 해군의 서해 남침 저지선이다. 유엔군의 일방적인 선언이었다. 그게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의 단초이다.
 휴전 성립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육지의 분할은 38선으로,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나 서해 해상은 논의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는 가운데 휴전이 채결되고 만다. 이후 미군이 주축인 유엔군의 막강한 위력에 눌린 북한 해군은 서해 군사봉쇄선에서 발이 묶인다. 봉쇄선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으름장을 놓은 최후 통첩선이다. 1960년 케네디의 피그만 봉쇄 사건이 그런 경우이다.
 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이승만 정권은 전후 잿더미위에서 입으로만 북진통일을 외웠다. 초등학교 교과서 맨 뒷면 판권지에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를 휘날려 남북통일을 완수하자.”는 구호를 찍어 적개심을 돋았다. 반공이 최우선이었다.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정권유지의 도구로 삼았다.
 유엔군은 어렵게 이룬 휴전이 재발될 개연성을 계산하였다. 이승만정권의 북진통일론을 예의 주시하였다. 유엔군은, 이번에는, 한국군의 북진 제한 선을 그었다. 그게 NLL로 약칭되는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이다. 북한의 남침 저지선을 되살려 한국군의 북진 제한선으로 삼은 셈이다. 북한에게는 남침저지용으로, 한국군에게는 북진 저지용으로 그렇게 그어진 NLL이 50년을 넘게 고착되어 한국군의 실효적 통제(effective control)아래 놓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정부가 실효적 통제를 말하는 배경에는 국제적 관례인 ‘응고의 원칙’이 도사리고 있다. 적법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사실이 오래도록 그 상태가 지속되면 기정사실화 되는 관례이다. 우리정부는 응고의 원칙을, 북한은 국제법 운운하는 이유가 이런 차이 때문이다.
 NLL은 국제법상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일방적인 봉쇄선이나 국제적 관례인 ‘응고의 원칙’이 준용되는 현장이기도하다.
 6·15 남북합의문은 이런 미세한 남북 간의 오랜 현실적 차이를 좁힌 매우 중요한 선언이다. 남과 북이 상호 협의 하에 NLL을 묵인한 셈이어서 매우 진전된 화해의 산물이었다. 50년이 걸려 얻은 남북사이의 합의 문건이 지금 휴지조각으로 구겨지고 있다.
 남북이 긴장하면 북한은 중병설이 떠도는 김정일 이후의 내부 결속을 위한 강경파의 득세를, 이명박 정부는 보수주의 대결집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정이 불안하면 외국 자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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