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容忍)정신과 우보(牛步)

백 종만(전북대 사회과학대학장)

교수신문이 180명의 학자들을 대상으로 새해에 바라는 희망의 사자성어를 조사한 결과 39%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선택하였다. 화이부동은 논어의 자로(子路)편에 있는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것들끼리의 조화를 도모하는데, 소인은 다름을 인정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엇이나 같은 것을 추구하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에서 나온 말이다. 기축(己丑)년의 화두(話頭)인 화이부동은 이념과 계층 간에 가치와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용인하고, 사회구성원들 간에 가치와 이해의 조화를 추구하는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국사회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설파하는 메시지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치질서로서 민주공화주의를 선언하고 있지만, 다양성과 차이를 관용하고 정치적 합의 통해서 민주적으로 구성원들의 삶의 가치와 이해관계를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조화시키려는 공화주의정신이 현실 정치에서는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다. 2008년 우리의 정치는 잃어버린 10년을 되찾자는 구호 아래, 성장과 분배의 조화라는 가치나 사회적배제자들의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주장에 귀를 닫고, 모든 다른 목소리를 삼키는 성장과 개발이라는 경적을 울리며 질주하는 덤프트럭과 같은 일방통행의 정치였다. 한국정치의 후진성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획일적인 가치와 이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실현하려는 정치의식과 시민의식에서 비롯된다. 생각건대 지난 10년은 개발시대를 주도한 가치와 이해관계에 가볍게 태클을 건 시대였고, 우리사회에서 억눌렸던 분배와 나눔의 가치가 자리할 작지만 소중한 정치적 공간이 열렸던 시대였다. 새 정권은 지난 10년간 비로소 싹트기 시작한 다양한 가치에 대한 용인과 배려의 정신을 철저하게 외면하며 일방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화이부동은 동일성만을 추구하는 일방주의 정치에서는 불가능하다.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그 것을 수용하는 양방향의 소통의 정치를 통해서 사회통합과 사회발전이 가능하다. 쌍 방향의 소통은 똘레랑스(tolerance)정신에서 비롯된다. 똘레랑스는 유럽의 종교 전쟁에서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죽이는 비극에서 탄생한 회개의 눈물이라고 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을 뜻한다.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닌 다른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역사적 교훈이 바로 똘레랑스이다. 상대에 대한 관용이 아닌 용인(容忍), 배려(配慮)가 실종된 시대는 죽은 시대이다.
중국 고전 가운데 하나인 국어(國語)에 나오는 “다른 것들끼리 만나서 조화를 이루고 협조하면 만물이 번창하지만, 차이를 말살하고 동일하게 해버리면 지속되지 못한다(和實生物, 同 則不繼)”는 말이 함축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우리의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음미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 정치는 가치와 이해관계의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일방적 소통이 아닌 쌍방적 소통을 통한 사회적 갈등해결방법과 다르지 않다. 이익과 가치를 조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서로 다름을 확인하고 이해를 조정하는 데에는 인내와 시간 그리고 쌍방향 소통이 필요하다. 최근 들어 ‘속도전’이라는 전쟁 용어가 자주 등장하고 지하 벙커에서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경제라는 것이 자본이라는 물적 토대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닌데, 노동을 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무차별 폭격을 하여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다름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고, 상호 이해의 조정에 필요한 시간에 대한 인내의 부족이 그 원인이다. 올해도 우리의 정치가 동이불화(同而不和)라는 일방주의와, 속도전이라는 다급함과 결합된 채로 진행된다면, 그것이 몰고 올 사회적 파장이 어떤 모습이 될지 두렵기 조차도 하다. 올해는 소의 해이다. 자연과 조화하며 밭을 경작하는 소처럼 뚜벅뚜벅 걷는 우보(牛步)가 한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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