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국회에 가면 가장 낯익은 풍경이 하나 있다. 바로 국회 견학단이다. 초등학교 어린 학생들부터 백발 성성한 노인들까지 각계각층 사람들이 ‘민의의 전당’을 꼼꼼히 훑어본다. 여기에는 의레 국회의원들이 나와 안내와 설명을 한다. 분위기는 매우 엄숙하다. 시민들은 웅장한 건물과 세련된 시설 등 민의의 전당다운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웅장한 석조건물이나 높은 천장 그리고 값나가는 집기들을 보자고 온 것이 아니다. 시민들은 의정 현장에서 두 눈으로 살아 움직이는 민주주의를 확인하는 것이다. 또 어린 학생들은 장래 이 사회를 맡을 동량으로서 민주주의를 배우고 체험한다.
그런데 요즘 국회는 견학단을 맞을 자격이 없어 보인다. 토론과 상생이라는 민주주의는 어느덧 당파이기주의의 덫에 걸려 심하게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머 국회’로 대표되는 여야 극한충돌은 전투상황이나 다름없다. 부수고 멱살잡이를 하고 욕설이 난무한다. 급기야 해머와 소화기 분말까지 등장해 판을 키웠다. 해외 언론들이 이 장면을 전하면서 아시아 민주주의 위기라고 제목을 달았다. 수십년 전 한국 민주주의를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 찾기’라고 비아냥댔던 그들이었으니 그럴법하다.
문제를 당파이기주의로만 치부하면 단견이다. 핵심은 우리 정치문화의 미성숙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협상이 실종된 점이다. 흔히 우리가 사는 세상을 거대한 협상테이블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협상대상이라는 말이다. 어떤 이는 세상의 80%가 협상이라고 말한다.
선진국 정치에서 그 것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로 밀고 당기고 주고 받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한다. 테크닉도 화려하고 또 뒤 끝도 깨끗하다. 룰이 엄수되기 때문이다. 결과는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간다. 필수적으로 따르는 양보 때문에 언뜻 손해 보는 듯 하지만 크게 보아 서로 윈윈하는 게임이 된다.
이를 보는 국민들도 즐겁다. 마치 게임을 즐기듯 정치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사이에 삽화처럼 끼는 유머와 달변은 최고의 즐길거리다. 협상을 토대로 이뤄지는 정치게임은 하나의 잘 만든 드라마다.
반면 우리 정치인들은 협상에 아주 서투르다. 협상보다는 전투상황에 능숙하다. 아마도 과거 군사정권의 폭압에 맞서 싸우는 투사정신이 이어져 내려온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보다는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 탓에 협상에 미숙한 이유가 크다고 본다. 전투는 죽고 사는 살벌한 상황이다.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무슨 수를 쓰든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한쪽은 피를 흘려야 하고 결국 양쪽 다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엄청나다.
좁은 지역사회를 보아도 그렇다. 지방자치 현장에서 갈등은 브레이크 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지방자치단체간 분쟁에서부터 주민과 주민 그리고 주민과 지방자치단체 간 등 모든 갈등에서 협상은 드물고 전투는 성행한다. 흔히 ‘떼법’이라고 부르는 집단행동이 해결책인 경우가 흔하다. 어느 한쪽이 백기를 들지 않는 한 갈등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쯤에서 결론은 명백해진다. 우리사회의 협상문화가 더 성숙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식으로 제 코앞의 이익만 고집하고 으르렁대면 그에 따르는 사회적 비용은 고스란히 모두에게 간다. 이른바 ‘로스로스 게임’이다. 둘 다 손해다.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은 분위기가 확 다르다. 본질은 훼손하지 않으면서 작은 이익과 작은 손해를 나눈다. 이 과정에서 말이 부드러워지고 행동도 점잖아진다. 자신의 관점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문제를 다루는 여유가 생긴다. 당연히 양보가 뒤따르면서 화기애애해진다.
아마도 우리 여야 국회의원님들은 협상에 관한 재교육을 받아야할 듯싶다. 견학단을 앞에 두고 목에 힘을 줄 것이 아니라 실적 많은 세일즈맨이라도 모셔다가 협상술을 배울 일이다. 배울 건 배워야 미래가 있다. 내일 죽을 것 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는 유태인들의 교훈을 따르는 게 좋겠다. 그래야 저질 시비에서 벗어난다. 오래전에 경제는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어느 재벌총수의 말은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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