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앞에 별칭을 붙이는 걸 좋아했다. 이름은 실체이고 별명은 상징이라 생각했을 터이다. 오래된 옛 사람들만은 아니다. 아직도 그 관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상징어로서 자신을 대변하고 싶어 하는 심리는 매우 깊은 듯하다. 그 관행은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때로 그 별칭이 실제보다 더 이미지화 되어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시인 최승범이 그를 야린(野麟)이라 했다한다. 그가 고향 전라도 땅에 처음으로 조각을 가져온 야린 배형식(裴亨植926-2002)이었다. 조각(彫刻)이란 나무나 돌 등을
세상에는 신기하고 진기한 것도 많다. 하기야 세상 만물이 모두 신이 만든 것이라 하니 세상의 모든 것이 신기(神技)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나 사람의 것으로 신의 경지를 이룬 것들도 있다. 신기한 것과 진기한 것이 실상 크게 구분되는 것도 아니지만 신기한 것들 중에서 정말 더욱 뛰어난 것을 진기(眞技)한 것이라 할 것이다. 오래전에 옛사람들은 그림을 평할 때 신품(神品), 묘품(妙品), 능품(能品) 등으로 구분하였다. 그런 후 진품이나 법품(法品) 등의 용어들이 사용 되었으나 이들 모두 신의 경지를 말하는 것일 텐데 우리 역사에서도
남녀가 유별하였고, 사람의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시절에 여성이 역사에 기억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신이 되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에는 실로 그것은 부처님의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 “광덕산 부도암도(廣德山浮圖庵圖)”를 남긴 설씨부인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가 없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시절에 그녀는 역사를 기록했다. 순창에는 오래전부터 부처가 계셨다. 하기야 부처는 처처(處處)에 머무신다 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부처가 머물지
그녀의 작품은 일반적인 여느 여류화가들의 그것처럼 밝고 가볍거나 혹은 화려하거나 매끄럽지도 않았다. 모든 여성 작가들이 그런 것은 아닐 터이지만 특히 그녀의 작품은 남달랐다. 필세가 굵고 힘이 넘치며 무겁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 특징으로 깊고 숙성된 맛은 특별하였다. 그 작품들이 특히 동시대 다른 남성작가들 못지않은 에너지와 오래 묵은 장맛을 낼 수 있었던 연유는 아무래도 전라도 특유의 흙빛과 바람에 있었을 터였다. 그녀의 붓질은 굵직한 판소리 가락과 같고, 투박한 질감은 쉰 소리 그대로였다. 깊이 스민 물맛은 오래 숙성된 장맛과
민주지산, 삼봉산, 적상산 등의 혈액 같은 핏물들이 숨길을 찾아 흘러내려 남대천을 이룬다. 이 무주 남대천을 흐르는 맑은 정기와 같은 혈액들은 실상 모두 덕유의 것이다. 덕유(德裕)는 말 그대로 너그러움이 층층이 쌓인 모습으로, 큰 산을 이루어 덕유산이라 하였다. 실로 덕유산은 낮지 않다. 덕유는 소백산맥의 중심체로서 반도 남부를 동서로 나누며 삶의 형태를 구분하였다. 그래서 이 땅의 인심들을 아울러야 했던 덕유산은 중봉, 무룡산, 덕유평전, 삿갓봉 등 1400m가 넘는 큰 산 들을 거느려야 했다. 서릿발처럼 냉정하고, 맑기는 10
내장산이 복룡재를 통해 내려 보내는 자신의 혈액과 같은 맑은 물은 산 아래 첫 마을인 순창 복흥 서마리 앞을 돌아보고 한가하고 여유롭게 흘러 섬진강을 만들었다. 순창에서 섬진의 의미를 읽으려면 서북쪽 끝에서 마치 저고리 앞섶을 살짝 펼치듯이 하고 서있는 내장산을 찾아야만 한다. 지금은 서마리 좌. 우에 매끄럽게 다듬어 쉽게 달려갈 수 있는 길이지만, 실상 섬진 물의 출발지의 하나인 이곳은 깊고 깊은 첩첩산중이었다. 어찌나 물이 맑은지 거울삼아 얼굴을 비쳐 볼만도 하다. 그 내장 심중에서 흘러나오는 물빛에 속세의 빚을 갚아야 할 것
남원 지리산 골에는 운봉이 있다. 운봉은 구름이 노는 산봉우리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를 우리는 글자로만 이해할 일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이곳 운봉에서는 우리민족의 한을 소리로 풀어낸 가왕이라 부르는 소리꾼 송흥록이 태어난 곳이다. 그가 왜 하필 깊은 산골 운봉에서 태어나야 했는지 그 내력을 읽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인 듯하다. 아주 오래된 옛날이었다. 세상이 하도 고요하여 시간이라는 존재도 없었고 그리고 사람의 모습도 없었던 매우 오래전의 일이었다. 하늘의 천재(天宰) 환인(桓因)은 맑고 고운 땅을 찾아 아들 환웅을 내려 보냈
불같은 땅. 아니 불타는 땅이다. 그날도 햇살은 불처럼 뜨거웠고 땅은 불빛으로 물들어 이글거리고 있었다. 키 낮은 풀잎 뒤에 숨어있는 메뚜기가 정말 숨을 쉬는지조차도 확인할 수 없는 날이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폭풍전야처럼 적막감이 감도는 예사스럽지 않은 공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바닥이 깊지 않은 가마솥 같기도 하고 혹은 키가 낮은 소쿠리 속 같기도 한 황토현 골짜기는 그 옛날 그때처럼 불길이 심장 한가운데서 솟아나듯 화끈거리고 있었다. 그래서 황토현인지도 모를 일이다. 옅은 보라의 맑은 빛깔이 투명해 보이는 싱싱하고 청초한
전주 화산 아래 옛 희현당에 세워진 신흥학교 학생인 이순재(李淳宰)는 늘상 천변을 거닐며 작은 돌멩이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자주 다가산에 올라 허물어진 전주 성곽을 바라보며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교실에 남아 책장을 넘기는 일보다 귀하게 얻은 몽당연필과 텁텁한 스케치북을 들고 다가산을 오르는 것이 즐거운 학생이었다. 다가산에 오르면 마치 요즘처럼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먹구름의 무거운 발길처럼 그의 가슴이 먹먹해 오는 것을 느끼곤 하였다. 서문 밖 전주천도 그렇게 흘러가는 듯했다. 예전 전주 서문 밖은
옛 사람들이 왜 굳이 시라 하고 소설이라 하며 글을 구분하였는지 새삼스럽다. 詩는 왜 고상한 언어라고 하였으며, 小說은 참으로 하찮은 이야기라 했는지 이해할 만하였다. 어느 글인들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듯하나, 그럼에도 석정의 시는 참으로 뚜렷하고 광활하였다. 잔잔하고 맑은 것이 하필이면 난초 잎이었고, 수선 같았다. 그렇더라도 그 의지는 먼 천국이었고, 바다 넘어 끝이 없어보였다. 아마도 그의 산천이 그러했던 것 같다. 그의 고향 부안은 반도의 서쪽 끝 작은 복주머니처럼 생겼으나 보기에 따라 별다를 것이 없다.
그리 시간이 멀지도 않은 지난 1847년에 고창에는 꽃씨 하나가 떨어졌다. 아직 세상은 어둠이었다. 능소화가 화사했고 들녘에는 망초 꽃이 가득했어도 장마구름이 가득한 하늘처럼 막막하였던 세상이었다. 여자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그랬던 시절에 고창에서는 특별한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꽃이라면 한반도 여기저기 철따라 피는 것이어서 그리 별 다를게있을리 없겠으나 유독 고창에는 소리 꽃 하나가 피었다. 어쩌면 그 무렵이 능소화가 흐드러진 지금과 같은 때였는지 모르겠다. 그렇다한들 이곳 고창이 들이 넓고 바다가 가깝다는 것 외에 그리 색다르
·낭곡 최석환(1808-?)은 참으로 신비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신기하게도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것이 없다. 그처럼 사람들은 때로 알 수없는 어떤 세계에 매달리기도 한다. 어쩌면 어느 일부의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우리가 어디서 와서 결국에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 것이다. 아주 아주 오래된 사건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비밀 하나쯤은 가슴에 가지고
엊그제 부처가 다녀가셨다 해서 찾은 금당사에는 봄 생명들의 합창이 은은하였다. 진안 마령에서 마이산에 드는 길은 정갈하고 싱그러웠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물은 여유로웠고 하늘을 덮은 벚나무 길은 한적하여 불가에 드는 엄숙한 고요가 한참을 따라와 줬다. 그러나 마치 좌선에 든 부처의 심중처럼 엄정하던 산골의 한적함이 금당사 입구에 몰려든 중생들의 소란으로 들떠있었다. 금당사가 마이산에 드는 남쪽 초입에 자리한 터였다. 금당(金塘)은 또한 金堂으로 불리기도 하나 어떻든 이는 부처의 거처를 뜻하는 것이어서 분명 이곳에 부처가 계시리라 믿었
지평선,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그래서 사실 어떤 막연한 미래를 헤집어 보는 환상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평선은 그렇게 아득하고 멀리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지평선을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호남평야에서만 가능하다. 만경평야라고 부르기도 하는 호남평야에는 지평선이 있다. 땅과 물색과 하늘빛이 어우러지는 호남의 지평선은 오늘도 모호한 안개 속에서 망망하기만 하였다. 호남평야의 중심인 김제 들녘 한 가운데서 바라보는 지평선은 참으로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들녘에는 짙은 초록 물을 가득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시인 김춘수는 썼다. 온갖 꽃들이 카펫을 깔듯 세상을 덮어가고 있는 봄날에 김춘수 시인의 “꽃” 한 소절을 떠올리는 것은 참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이름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이미 꽃이었던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름은 영혼이고 실체인가 보다. 발산(鉢山)이 그렇다. 이름대로라면 스님의 밥그릇처럼 생긴 산이라는 뜻이 아닐까? 혹은 불가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물건들을 일컫기
첩첩이 깊은 산골에도 봄은 가득 담겨있다. 마치 몇 겹의 보자기로 신중하고 정성스럽게 감싼 선물을 헤집어 보는 것 같은 순창의 봄이었다. 어쩌면 옛 글에서나 읽었던 무릉도원의 세계를 눈앞에서 만났는지도 모르겠다. 안견이 그린 무릉도원도가 결코 이보다 더 곱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가벼운 봄비 소식이 있어 간간이 잔비가 내릴 듯 말 듯 하는 하늘은 속이 깊고, 하얀 사기로 구운 물그릇에 먹물이 번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하얀 봄꽃들이 더욱 돋보이는 날이다. 봄은 어떻게 이렇듯 깊은 산골까지 잊지 않고 찾아드는지 참으로 신기하기만
3월의 맑은 햇살은 산천 곳곳에서 피고 있었다. 아직 찬기가 진한 이른 봄이었지만 김제와 부안으로 이어지는 너른 들녘을 흠뻑 적시고 있는 햇볕은 분명 새로운 것이었다. 오만가지 생명들이 앞 다투어 대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산수유의 노란 물과 산자락 곳곳에서 흐드러져 피어있는 매화는 이미 이 땅이 이른 봄 품안에 있음을 알려왔지만, 봄물은 아무래도 버들잎의 연녹색에서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감동의 눈물이며 촉촉한 대지의 호흡이기도 하였다. 짙은 황토 빛 피부를 훤히 드러내고 나른한 봄 햇살을 받아내고 있는 부안의 나지막한 산자락
전라도 한 복판에서 남북을 나누고 어떤 진한 비밀을 간직한 듯 서있는 내장산의 심중이 궁금하였다. 서해를 따라가며 길게 펼쳐져 있는 호남의 들녘을 굳이 둘로 갈라 뚜렷한 변화를 도모하였던 내장산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 비밀의 열쇠는 끝내 그의 이름 내장(內藏)에서 찾아야 할 듯했다. 과연 그는 무엇을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꼭 알아내야만 하는 어떤 보물찾기와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혹시 내장산 품에 들어있는 내장사나 혹은 백양사. 구암사 등에서 촛불의 연기처럼 잔잔히 울리는 불경(佛經)을 외는
서해 바다는 우리에게 언제나 꿈이었고, 기다림이었다. 이 땅의 풍요를 서해에서 얻었고 또한 서해에 빌었다. 그 옛날 호기심이 많았던 마한 사람들은 서해를 떠나 머나먼 천측을 만났고, 나아가 페르시아까지 찾아들었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큰 줄기는 서해를 향해 마치 잔 뿌리를 내리듯 달려내려 왔다. 그 큰 발길의 한 끝이 변산이었다. 변산은 마치 태백의 엄지발톱처럼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서해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뱃길은 엄숙한 것이어서 언제나 뱃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것이었다. 이 곳 변산 앞 바다를 사람들은 칠산바다라고 불렀
새해 들어 종남산 마루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는 예사롭지 않았다. 서방산에서 급하게 종남산을 타고 내려오는 깊고 예리한 겨울바람 탓은 아닌 듯하다. 아직껏 남아있는 몇 개의 마른 참나무 잎이며, 무겁고 짙은 빛의 솔잎들이 부산하게 떨고 있는 것을 어찌 바람 탓이라 할까? 새로운 한해를 맞아들이는 성스러운 울림이라고 볼일이다. 이 울림들이 종남산 아래 송광사 대웅전 추녀 끝에 달려있는 풍경을 거들고 있다. 때마침 한 낮이어서 햇살은 청명하고 땅 밑 온기가 피어올라 대웅전 앞마당은 윤기가 흐른다. 하늘과 땅의 조응이 예사롭지 않게 새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