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 기획연재가 진행되던 지난 8월말 깜짝 놀라운 사실이 전해졌다. 익산시와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금마면 익산토성(사적 제92호) 발굴조사에서 익산이 백제 수도였음을 증명하는 기와 등을 발굴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발표는 ‘익산이 백제 무왕 때 수도였음을 확인해주는 '수부'(首府)라고 새긴 인장기와가 서문지(서문 터) 주변에서 출토됐고 백제시대 수막새(마무리 기와)도 함께 나왔다’는 내용이다. 수부 기와는 수도 지역임을 지칭하는 유물로, 왕궁으로 추정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과 피난성인 부소산성에서 같은 기와가
가련하구나/완산의 아이/아버지를 잃고/ 눈물만 흘리는구나/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후백제 비운의 영웅 '견훤'의 말년을 위 노래인 '완산요'로 표현한다.한때 고려왕 왕건을 능가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견훤은 935년 넷째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지만 꽃을 시샘하는 찬바람이 몹시 불던 3월 다른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둠)신세에 처하게 된다. '가엾은 완산 아이'라는 노래가 불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이렇듯 금산사는 후백제를
우여곡절 끝에 전주에 천도한 견훤은 왕궁을 어디에 세웠을까. 오랜 관심사임에도 해답을 찾진 못했으나 동고산성설을 비롯해 물왕멀설, 전라감영설, 인봉리설 등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그 중 가장 먼저 주목받은 건 동고산성이다. 1990년부터 꾸준히, 수차례 발굴조사해 전모가 드러났을 뿐 아니라 산꼭대기 중앙부에 우리나라 최대 규모인 길이 84.2m의 대형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승암산 북쪽 골짜기 풍수지리상 거주하기에 적합지 않을 뿐 아니라 겨울철 보온을 위한 온돌시설이 발견되지 않고 식생활 유물도 적은 등 왕궁보다는 피난
최근 후삼국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고려 건국과정이나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 등 기존의 고려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후삼국 자체를 조명해야한다는 시각이 호응을 얻고 있다. 더불어 후삼국 건국 주역인 견훤이나 궁예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벗어나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후백제 수도였던 전주 나아가 전북에서도 후백제 역사와 정체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도성을 비롯해 유적과 유물, 대외관계 등 전반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본지에서는 견훤의 전주성 입성과 후백제 도성을 2부에 걸쳐 살
660년에 벌어진 기벌포전투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와의 전투였다. 676년 기벌포전투는 신라와 당나라가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벌인 전투였다. 이 두 전투가 벌어진 기벌포(백강)는 현재 금강으로 비정되고 있다. 반면 663년에 벌어진 백강 전투는 금강이 아닌 현재 동진강에서 벌어진 전투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박영철 군산대교수는 지난 2016년 11월 열린 백강전투 재조명을 위한 한·중·일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자료의 재검토를 통해 663년 백강 전투 당시 백강의 위치를 동진강으로 비정한 바 있다. 박 교수는 주류성의 위치와
서기 660년 6월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를 침공한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는 바다에서, 신라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군대는 육지에서 백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백제는 바다의 전략적 요충지인 기벌포로 쳐들어오는 당나라 군대를 막지 못했고 신라군의 진격을 방어하기 좋은 육지 요충지인 탄현에서도 신라군을 방어하는데 실패했다. 충신 계백장군은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맞섰지만 결국 이 황산벌전투에서 신라군을 막지 못하고 전사했다. 의자왕은 사비성을 왕자 태에게 맡긴 채 웅진성으로 피난을 갔지만 사비성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은 당시 과학이 예술로 표현된 직접적인 사례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나라의 국력이 최고조에 오르면 당대의 과학과 권력이 총동원돼 위대한 건축이 만들어지곤 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에는 소위 '황금비율'이라는 기하학과 도리아식으로 불리는 예술양식이 적용됐으며 또한 무굴제국 최고의 걸작중 하나 ‘궁전의 왕관‘이란 뜻을 가진 ‘타지마할 묘’역시 20여년의 시간과 2만여명의 기술자가 동원돼 과학과 예술이 적용됐다. 이러한 세계적인 건축물과 견줄 만한 것이 우리지역에도 있으니 그
익산 미륵사는 외세 침략을 막기위한 호국사찰이었다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백제의 고도 하면 충남 공주와 부여를 떠올리는게 당연시 여겨졌었다. 그 곳에는 백제의 도시라 불릴 만큼 다양한 역사와 문화재가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익산 역시 백제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공주나 부여처럼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하지만 익산은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장이다. 백제 무왕이 누구던가. 신라의 선화공주와 국적을 초월한 전설 같은 순애보를 남긴 왕이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백제의 또 다른 고장, 익산에
물이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해석되는가. 물은 우리 신체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마시는 음용수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을 지배하는 불질로 그 중요성은 예전부터 부각돼 왔다.구석기시대의 불과 석기 사용이 인간으로서 삶의 시작이었다면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창조물인 토기의 사용과 더불어 농경의 시작은 진정 인간다운 삶을 향한 위대한 진보였다.청동기 시대를 거쳐 고대~중세로 이어지면서 물 관리, 즉 ‘치수’는 지역집단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이중에 한반도 거주민들의 주요 식량원 이었던
익산 왕궁리유적은 1989년부터 시작된 발굴 조사 결과 다양한 유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화한 만큼 대부분 왕궁이나 사찰과 관련돼 있으며 그에 얽힌 이야기도 풍성하다. 이는 왕궁리유적의 공간과 특성은 물론 백제의 생활상과 위상까지 말해줘 당시 익산과 백제를 읽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왕궁리 5층 석탑(국보 제289호) 보수작업 중 발견된 일괄유물을 비롯해 금제품 및 유리제품, 수부명기와, 수막새, 도가니, 중국제 청자편, 전달린토기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 중 일부는 2008년 왕궁리유적 남측에 건립된
남원에는 대가야 못잖은 가야왕국이 있었다요즘 흔하게 사용되는 블랙박스는 예전에는 항공기 사고 원인을 분석하는데 쓰였지만 오늘날에는 자동차에도 설치돼 사고 정황 분석은 물론, 범죄현장까지 기록돼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예로부터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그 주인이 묻힌 무덤 또한 그냥 후세에 잊혀져가고 있지만 그 무덤 속에 있는 유물들은 오늘날의 블랙박스와 같은 역사 기록물로 남아있다. 이는 당시 고분의 주인이 어느 시대 어느 계층였는지와 과거의 역사를 점쳐볼 수 있는 중요한 물증이라 할 수 있다.최근 남원지역에서 잊혀 묻힐뻔 했던 15
고사부리성은 현재 정읍시 고부면 소재지에 있는 성황산(해발 133m)에 있다. 고부향교와 고부초등학교 뒤편에 있는 나지막한 성황산이 바로 마한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역 거점으로 중요시되던 지역이었다.마한시대에는 동진강 유역을 기반으로 여러 소국이 있었다.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고부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보이는 고리비국을 비롯해서 초산도비리국, 모로비리국, 벽비리국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마한 고리비국이 있던 고부지역은 4세기 중반 백제 근초고왕에 의해 백제 영역으로 귀속된다. ‘고사부리성’이라는 명칭이 현존하는 문헌에 처
예술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대변해 왔고 그 중에서도 음악은 가장 친근하게 존재해왔다. 보편적인 감정을 누군가의 특별한 생각과 음색으로 접했을 때 느끼는 공감과 희열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한국 사람들은 언제부터 노래를 불렀는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백제에는 가요가 존재했다. 에서 언급하는 ‘정읍사’ ‘방등산곡’ ‘선운산곡’ ‘무등산곡’ ‘지리산곡’이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평민들의 현실과 기다림을 다뤘다는 점이다. 실제 정읍사는 행상을, 선운산곡은 부역을, 방등산곡과 무등산곡은 도적으로 인한
1500년 시차를 두고 나타난 익산 웅포 입점리 고분군은 백제역사의 물줄기 속 큰 물음표로 인식돼 왔었다. 과연 무덤 속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그 곳에서 1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잠들어 있었을까.이 고분군은 당대 최고의 사기로 알려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거론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공백의 역사' 비어있는 페이지였다.1986년 새터 마을에 사는 한 학생이 칡을 캐다가 금동제 모자의 발견으로 알려지게 된 입점리 고분은 해발 240m의 함라산에서 금강변을 따라 뻗어 내린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익산은 마한 맹주국인 목지국이었다2-마한익산은 사람이 모여 살기 좋은 곳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익산의 북쪽에는 금강이, 남쪽에는 만경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에서 뻗어 나온 물줄기를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익산 지역에 남아 있는 옛 지명이나 고고학적 자료를 살펴보면, 금강의 물은 금마 일대까지, 만경강 물은 왕궁 일대까지 들어왔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물줄기는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거나 다른 곳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금강과 만경강 사이에는 ‘옥야’로 불릴 만큼 비옥하고 너른
기획-전북 백제 후백제 재발견1-프롤로그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웠던 백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지난 2015년 7월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충남 공주와 부여에 가려 과소평가되고 평가절하 되었던 전라북도내 백제 유적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 도내에 있는 유적의 등재가 도민들의 정체성 확립과 자긍심 고취, 백제사 연구 외연 확대 등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최근 백제사에서 전북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다. 그동안 백제 왕도(王都)